후야오방 복권과 천안문 사태 재평가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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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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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가 24주년을 맞았다. 중국 정부는 군인을 포함해 241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2000~3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개혁·개방 중국’, ‘G - 2 중국’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민주화 시위’ 대 ‘유혈 폭동’으로 성격 규정이 맞서는 만큼 이에 대한 해석도 아직은 극단을 달리고 있다.
홍콩에서는 매년 6월4일 저녁 ‘천안문사태 재평가와 중국의 정치개혁,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열린다. 천안문 사태 재평가가 민주화까지 닿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당시 실각한 자오쯔양 전 총서기와 사태의 촉발자라 할 수 있는 후야오방이다.
후야오방은 그의 개혁·개방적 성향 때문에 실각과 복권, 다시 실각을 반복한 인물이다. 문화혁명 때 덩샤오핑과 함께 쫓겨난 뒤 1973년 복권과 함께 돌아와 1982년 당 총서기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1987년 동구 대변동의 영향으로 빈발한 학생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강경파에 의해 실각했다. 그리고 2년 뒤 4월15일 심장병으로 급서했는데, 그를 추모하는 천안문 광장의 추모행렬이 대규모 민주화 시위로 변하며 결국 유혈참사로 막을 내린 천안문 사태로 이어졌고 이런 연유로 그는 ‘유혈 폭동’의 배후자로 금기시되어 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최근 다시 복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천안문 사태 재평가와 맞물리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후야오방의 고향인 중국 후난성 리우양시. 창샤에서 차로 2시간을 더 가야 하는 리우양시에서도 그의 옛집은 산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근 중국 언론이 그의 고택을 ‘국가급 중점 보호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보도가 세인의 관심을 모았는데 막상 찾아본 현장은 성역화나 다름없는 그 이상이었다.
수십여 가구가 있었다는 한 촌락이 후야오방의 저택만 남기고 다 철거됐고 공사가 한창인 생가주변엔 연꽃이 가득한 호수, 고급 수종의 나무가 들어선 정원이 수만평 공원 규모로 조성되고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기념관이나 다름없이 조성된 ‘후야오방 고택 진열관’이었다. 2층이었지만 규모가 제법 컸고, 입구엔 5미터는 족히 돼보이는 후야오방의 동상이 내방객을 맞고 있었다.
특히 2층 전시실에 내걸린 한 문서는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바로 1980년 당중앙 문건 19호로 발표된 “習仲勳反黨集團平反的通知”이다. 이 문서에는 시중쉰이 언제 이러이러한 반당행위로 처벌을 받았는데 이게 잘못된 것이어서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平反은 ‘잘못됐던 결정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복권보다도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전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건으로 시중쉰이 복권됐던 것이다. 시중쉰이 누구인가? 바로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친이다. 그리고 바로 이 복권 작업을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당시 당중앙 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후야오방이었다. 의미를 두자면 적지 않은 의미를 둘 수 있는 대목이다.
사전 예고 없이 찾은 취재진에게 “사진 촬영은 안된다”고 못을 박고 안내를 하던 직원은 시중쉰 관련 문건 하나만 사진에 담자는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다른 것도 안되지만 이건 더더욱 안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 직원은 또 왜 기념관이 아니라 ‘진열관’이냐는 물음에 “아직은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느냐? 그러나 몇 달 뒤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그때엔 간판도 다시 달 것이다”라고 말해 민감하지만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시의 따천다오(大陳島). 이곳에선 지난 1월6일 후야오방의 동상 제막식이 진행됐다. 특히 지방정부의 주도로 동상이 세워진 점이 주목된다. 이 섬과 후야오방은 어떤 관계가 있길래 동상까지 세운 것일까?
이 섬은 국민당군이 타이완으로 밀려나고 공산당이 중국을 건설한 이후에도 치열한 전투가 이어진 곳이다. 결국 1955년 1월 대결전 이후 국민당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타이완으로 철수를 하는데 이들은 1만4000명의 주민까지 철수시키면서 모든 가옥과 시설을 파괴해 섬을 폐허로 만들고 퇴각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섬 재건 작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주도한 게 바로 당시 민주주의청년단(후일의 공청단) 서기로 있던 후야오방이었다. 그는 1985년 당 총서기로 있을 당시 섬을 다시 찾았다. 바로 이런 연유로 후야오방의 동상이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저장성 당서기로 있던 2006년 8월 이곳을 찾아 둘러보았고 “노혁명가들의 간난신고의 분투를 절대 잊어선 안된다”, “따천다오 재건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어록을 남기는 등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섬 중앙에 있는 소년궁에후야오방 기념관이 있는데 바로 그 건물 통로에 시진핑의 어록이 원문 그대로 큼지막하게 조각돼 보존돼 있다.
지난달 10일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산하기관에서 좌담회를 개최해 “중국 개혁·개방 노선의 배경에 후야오방의 결정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그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등 후야오방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가 일고 있는게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6·4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는 어떨까? 이번에도 홍콩 등 많은 곳에서 ‘천안문 사태 재평가’를 외쳤지만 중국 정부의 변화는 감지되지 않고 있다.
한 개인에 대한 평가와 한 사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천안문사태는 체제문제다. 그러나 한 사건의 핵심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면, 그것이 공식화된다면 그 사건에 대해서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천안문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평가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예측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나 중국은 현재 국제 상식이 통하는 ‘대국 외교’가 자신들의 길이라고 천명하고 있으니, 거대한 수레바퀴의 궤적을 한눈에 예측하긴 어렵지만 어디로 향할지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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