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유인력 거스르는 새처럼 비상하는 기자가 돼라"

[기자협회 창립47주년 인터뷰] 언론계 원로 김중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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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역량으로 저널리즘의 종결자 되어야
기자협회-시민사회, 민주언론 운동 연대를


언 론운동의 산 역사이자 후배 기자들의 사표인 김중배 언론광장 상임대표(78). 9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클럽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를 겸한 점심식사까지 장장 5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긴 시간 동안 김중배 선생은 우리 언론계가 처한 현실을 다각도로 진단하고 새로운 사회를 여는 통찰자로서 기자의 사명 회복을 거듭 강조했다.
2003년 MBC 사장 퇴임 이후 오랫동안 언론에 말을 아꼈던 그는 이날 언론인으로 살아온 50여 년의 기억을 넘나들며 시간 속에서 정제된 이야기를 풀어냈다.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기억은 생생했고, 관심사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최근의 SNS 등장과 언론환경의 변화부터 1991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물러나며 스스로 던진 화두인 언론에 대한 자본의 도전, 그리고 좌우대립 논쟁을 꿰뚫는 철학까지 언론계의 고민거리들이 그의 입에서 쉼 없이 해부됐다.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아픈 데도 있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늙은 편은 아니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요즘 기자들은 ‘만능기자’이기를 강요받습니다. 현실의 요구이지만 저널리스트의 정신만은 변치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후배들에게 당부할 말씀을 해주십시오.
기자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자존이 필요합니다. 사주와 조직에만 충실한 것은 자존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기자들이 처한 현실적 조건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 현실을 극복해야 해요. 만유인력의 법칙을 뚫고 비상하는 새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진정 프로페셔널로서 저널리스트의 길입니다. 또 기자는 저널리즘의 종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자들이 종결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니 다른 종결자들에게 밀리는 것 아닙니까. 흔히 저널리즘을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만 나는 거울로 잎사귀만 비추는 게 아니라 그 뿌리를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결자에게 밀린다는 말씀이 뼈아픈데요.
폭우 재난상황에서 우리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위력을 확인했습니다. SNS의 속보성과 현장성을 기존 미디어가 따라갈 수 없었죠. 기존 미디어에 속한 기자들의 위기입니다. 이런 미디어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기자들의 길은 무엇일까요. 결국 프로페셔널의 길 밖에 없습니다. SNS 등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그것을 전문적으로 갈무리하고 전문가들의 견해까지 편집하고 편성해내는 프로페셔널의 길이 요구됩니다.

-1987년 1월 17일 동아일보에 쓰신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를 잊지 못합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응시하라고 요구한 이 칼럼이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해 주십시오.
박종철의 죽음은 단지 한 젊은이의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부터 시작해서 당시 천박한 수준이었던 인권이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인권을 말살하는 사회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어요. 이런 것을 피해가는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존립근거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데 그 칼럼이 문제없이 실릴 수 있었나요.
당시에 내 칼럼의 흐름을 잘 읽는 도사들이 더러 있었어요. 내가 쓰기도 전에 귀신같이 어떤 내용인지 점치는 사람들인데 그 칼럼은 안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해요. 신문사 내부와 외부에서 협박의 언사들도 있었어요. 외부에서 오는 협박이나 압력은 무던히 감내하는 편이었는데 정작 내부 시스템에 의한 통제는 그 조직을 떠나지 않는 한 배반할 수 없었어요.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칼럼도 어떤 부분은 상당히 수정이 됐어요.



   
 
     
 
김중배 선생은 당시 칼럼과 관련된 일화도 들려줬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무교동에 토요일만 되면 동아일보 칼럼을 복사해서 돌리는 구두닦이가 있다”고 말했다. 김중배 선생이 토요일 칼럼을 담당하던 때라 그 구두닦이를 수소문해서 찾아가 소주를 한잔 하면서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 30대의 구두닦이는 서슴없이 “숨이 막혀서 그랬어요”라고 답했다.
김중배 선생은 “프랑스에서 2차 대전 이후에 나치에 부역했던 지식인들을 숙청했는데 기자, 문필가, 작가들이 많이 포함됐다. 그들은 글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남겼기 때문에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며 “당시에 나도 내 칼럼이 역사에 증거로 남을 텐데 비유의 수법, 행간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비겁(?)한 논법을 구사했다”고 말했다. 시대의 부름에 기자로서 소명을 다하려했던 그의 칼럼이 결국 오늘의 그를 증명하고 있다.

-권력에 맞설 수 있었던 촌철살인의 사설과 칼럼의 원천이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때 많은 책을 읽었어요. 지금도 그때 읽은 책들의 내용이 기억납니다. 대학에 가서도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예활동을 했습니다. 평소 고 송건호 선생을 존경했어요. 논설위원이 됐을 때 찾아가 “어떻게 글을 써야 합니까?” 여쭈었어요. 송 선생은 뭘 그리 고민하느냐며 ‘결’이야기를 했어요. 장작을 패는데 결대로 패야 잘 패진다는 말씀을 해주셨죠. 즉 글이라는 것은 억지로 쓰면 안 되고 ‘결’대로 써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우리 사회는 유독 좌우 나누기가 심합니다. 언론도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으로 나뉘어 여기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나요.
좌파우파 나누기, 특히 거대 언론에서 걸핏하면 좌파정책이니 하면서 좌파딱지를 남용하는데 나도 그 기준이 뭔지 궁금해요. 한 젊은 친구가 “싫거나 미우면 좌파죠”라고 분석하기에 정곡을 찔렀다고 했어요. 좀 더 들여다보면 그들은 시장원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시장원리에 개입하고자 하는 이념이나 세력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장주의를 부르짖는 이 정권에서 금리를 시장에 맡겨야지 왜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하고, 물가억제정책을 쓰고, 경기부양책을 쓸까요. 그 사람들이 좌파라서 그런가요. 그렇지 않잖아요.

-조선 중앙 동아 매경에 종편까지 허가돼 방송과 신문을 겸영하는 거대 미디어그룹이 탄생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아주 전형적인 사례를 봐야 합니다. 바로 루퍼트 머독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요. 머독의 미디어 왕국이 과연 어떤 행위를 저질러왔는지 다 아는 것 아닙니까.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유로존 경제규모 3위인 이탈리아가 디폴트 위기에 놓여 있어요. 이번 미국의 신용평가 강등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싸고도 이탈리아에 대한 우려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이런 것을 우리가 잘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독점의 폐단이 과연 극소화될 수 있을 것인가. 일부에서는 우리 언론이 타락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공직자의 위장전입을 따지고 병역문제를 거론하는 정도의 도덕적 수준은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편은 아마도 시사교양보다는 오락 연예기능으로 갈 가능성이 더 농후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예측불허고 그 사람들 의지의 문제지만 그런 흐름으로 가지 않고는 경영의 문제, 시청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언론계에서는 KBS가 도청의혹과 이승만 다큐 방영 등으로 공영방송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합니다. MBC 김재철 사장의 사퇴소동이 있었습니다. 공영방송이 가야 할 방향을 말씀해주십시오.
지상파는 공공재입니다. 두 공영방송은 물적토대를 공공재에 기반하고 있고, 또 스스로의 설립목표로 공공방송을 자임하고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 정권 들어서 두 공영방송의 행태를 보면서 더러는 관영언론적 성격이라고 말해요. 나는 권력이 관리자를 내세운 ‘관료적 관리언론’이라고 규정합니다. 공영언론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 공존하는 보수와 진보의 지형을 반영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보도해야 합니다. 국민의 이념성향을 조사해보면 진보와 보수의 수적인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아요. 그런데도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것은 권력에 의해 공영방송이 관리되기 때문입니다. 소셜테이너 출연 제한이 단적인 예입니다.



   
 
     
 
-젊은 세대가 점차 신문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새로운 미디어들의 탄생이 중요합니다. 활자 미디어에 대한 상당한 이탈현상이 있어요.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는 사람들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어떤 새로운 미디어의 문화현상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신문이나 올드미디어들이 나아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신문을 포함한 저널리즘 내지 저널리스트의 위기상황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신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표적인 올드미디어인 신문이 이대로 SNS나 TV를 당할 수 있느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올드미디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바로 앞서 강조한 프로페셔널입니다. 우리 사회가 신문에 이것을 요구합니다. 통섭의 역량이 필요합니다. 저널리스트의 짐이 너무 무겁고 요구도 지나친 것 같지만 앞으로 그렇지 않고는 살길이 없습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와 언론광장의 대표를 역임하시며 언론개혁운동을 해오셨습니다. 역점을 두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얘기지만 명색이 선배로서 저널리즘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현역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저 자신에 대한 속죄이기도 하고, 민주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언론의 체계 또는 현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언론개혁운동에 종사했습니다. 그 과정에 역점을 뒀던 것이 신문사 사주나 광고를 포함한 광범위한 자본세력으로부터 기자들이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었어요. 언론사 소유지분의 제한, 편집편성권 독립을 위한 편집위원회, 방송의 경우에는 편성규약 등을 제안해서 법적으로는 나름대로 결실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운동이나 입법취지가 살아나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퇴행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95년 기자협회보 31주년 특집호 기고에서 “언론의 자유가 사주·발행인의 자유일 수 없다”며 “민주언론의 불씨를 다시 지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16년이 지났습니다. 기자협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십시오.
기자협회는 물론 언론 현업단체들이 우리 사회를 더욱 민주화하는 초석으로서 공론의 장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정권 들어서 저널리스트들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졌고, 해직 등 징계를 당한 기자가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주언론을 위해서 많은 후배들이 노력하고 있어 희망의 증거로 생각합니다. 움직임은 있으나 그것이 무브먼트가 되고 있는가. 하나의 전선을 형성한 운동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반드시 긍정하기만은 어려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시장원리주의 사회,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적자생존을 외치는 사회에서 우리 저널리스트의 생존문제도 현실적으로 절박합니다. 생존하면서 운동전선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밀도 있고 폭넓은 연대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은 해직시킬 수 있지만 백명, 천명, 모두를 해직시킬 수는 없습니다. 연대는 미디어 종사자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로 민주언론이 필요하고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사회와의 연대가 중요합니다.

대담=김신용 편집국장 trustkim@journalist.or.kr
정리·사진=이대호 기자 dhlee@journalist.or.kr



다시 읽는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에 실린 김중배 칼럼은 신문사 내·외부의 압력에 맞선 용기를 필요로 한 칼럼이었다. 군사정권이 언론을 통제하던 시대에 박종철 군의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며 인권 유린을 꾸짖고, 국회와 종교와 언론의 궐기를 촉구하고, 심지어 나라의 중심이 민중에 내려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외부의 협박은 안기부에서였고, 신문사 내부의 압력도 거셌다. 안기부 요원은 “아들딸을 생각하라”는 충고도 했다. 김중배 선생은 오직 저널리스트의 책무로 모든 것을 감내해냈다. 결국 이 칼럼은 일부 수정돼 지면에 실렸다. 수정된 게 이 정도라면 원본은 어땠을까.
이 칼럼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지 24년이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인권과 권력에 대한 생각에는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 칼럼은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이 후학을 가르칠 때 자주 언급하고 있고, 1987년의 항쟁을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인용되고 있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 스물한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 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號哭)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회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라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이젠 민주를 들먹이는 입술들마저 염치없어 보인다. 민주는 무엇을 위한 민주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하늘과 땅을 가꾸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민주를 들먹이기 이전에 인권을 말하자. 그 유린을 없애고 그 죽음을 없애는 인권의 소생을 먼저 외쳐야 한다.

나는 인권이 곧 나라임을 서슴없이 말해 온다. 인권의 희석되면 나라의 바탕인 민의 연대도 희석된다. 연대의 끈이 끊긴 나라는 사막의 나라일 뿐이다. 그 어길 수 없는 실감은 호곡하는 전화의 울림 속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한스 켈젠은 <민주정치의 진위를 가르는 것>이라는 저서에서 대표성과 다수결의 원리를 말하고, 종교와 경제의 민주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책엔 빠져 있는 인권을, 민주정치의 진위를 판별하는 으뜸가는 징표로 삼고 싶어 한다.

인권이 목적이라면, 민주는 그 수단이다. 따라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권력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 어느 땅에서나 민주를 노래할 수 없다. 인권이 유린되는 민주란 ‘레테르의 사기’이며 역설일 뿐이다.(중략)

그렇다. 인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어김없는 사람의 사람다운 도리인 것이다. 그 사람의 도리를 어기는 땅에선 어떤 찬란한 이데올로기도 무색할 뿐이다. 그 역리를 바로잡으려면 우선 박종철, 그의 죽음이 우리 앞에 눈이 부시도록 조명되어야 한다. 사인은 거침없이 밝혀지고 사인을 죽이는 길이 열려야 한다.

그 무거운 과제는 경찰이나 검찰만의 책무는 아니다. 그의 죽음은 이제 나라의 일이다. 겨레의 일이다. 한 젊음의 삶은 지구보다도 무겁다. 죽음의 무게도 그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국회가 불을 밝혀야 하고 종교와 법률전문직 단체가 연대의 전열에 나서야 한다. 언론도 ‘제약’의 무덤 속에서 헤쳐 나와야 한다. 그의 죽음과 삶은 그 한 젊은이만의 죽음과 삶일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죽음과 삶이다.

이제 거짓의 하늘은 사라져야 한다. 거짓의 땅도 파헤쳐야 한다. 거짓의 사람들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라의 중심도 권력 쪽에서 내려 잡혀야 한다. 나라의 중심이 힘을 가진 자 쪽에 두어져서는 안 된다. 힘이 없는 민중 쪽에, 나라의 중심이 내려 잡혀야 한다.

광주의 5월에 이어지는 <5월 시> 동인들은 일찍이 <하늘아, 땅아, 많은 사람아>를 외쳤다. 이제 박종철, 그의 죽음 앞에서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의 호곡이 피어난다. 그 호곡을 잠들게 하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이 피어나게 하라. 그것이 그의 죽음을 영생으로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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