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다음가는 자유/자유의 다음가는 게시판/너무나 어려운 휴식이여/눈물이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는/게시판과 너 사이에/오늘의 생활이 있을진대’-김수영 `기자의 정열’중에서.
자유와 비애를 노래했던 시인 김수영. 그가 잠시 몸담았던 평화신문 문화부 차장 시절 썼던 시다. 그의 다른 시들과 달리 시적 여유가 보이지 않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김수영 역시 신문쟁이가 쉽지 않았으리라 유추해본다.
나는 가끔씩 서재의 한 켠에 꽂혀 있는 빛바랜 김수영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꺼내 읽기를 좋아한다.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민음사)나 에세이집 `시여 침을 뱉어라’(민음사)는 내 삶의 각성서(覺醒書)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차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중략)/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요리집에 들어가고/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중략)/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하…… 그림자가 없다’중에서
도회적 감성을 바탕으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그의 시편들은 나의 나태함을 깨우고, 나의 오만함을 다잡는다. 십수년 전 그가 출판사에 번역료를 받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나오면서 걸었을 덕수궁 돌담길을 걸을 때도 김수영이 그토록 열망했던 `자유’의 의미를 곱씹기도 한다. 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라고 뇌까려본다.
그는 갔고 또다른 세기가 시작됐지만 우리네 사는 풍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가 침을 뱉었던 미국의 입김은 날로 거세지고, 또다른 것들이 몰려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카크 다글라스 대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우리 앞에 있다. 참담함을 곱씹기보단 그의 이런 시 한 편은 어떨까.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응아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눈’ 전문.
친구여 빙판길 조심하시라.
오광수 경향신문 대중문화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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