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의 효순·미선양 추모식
제226회 이달의 기자상 전문보도부문 / 경인일보 최재훈 기자
경인일보 최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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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2 15: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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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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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13일 경기북부에 주둔한 미2사단 장갑차에 여중생 2명이 깔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월드컵이라는 축제에 묻혀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효순·미선양의 안타까운 희생이 경인일보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온 국민은 미국 대통령의 사과와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 등을 요구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주한 미군은 그 해 9월 사죄의 의미를 담아 사고 현장에 추모비를 세웠다. 그러나 추모비를 인정하지 않는 시민단체의 반발로 미군의 공식적인 참배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런 반미감정 등으로 주한 미군은 효순·미선의 추모비를 극비에 참배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매년 추모비를 찾았으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7년의 시간이 지난 6월. 말초신경 마비로 인해 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는 새벽에 외출증을 받아 추모비로 향했다. 주한미군의 추모식을 포착하기 위해 매일 아침 추모비 인근 산속에서 미군을 기다렸다. 10일 오전 6시40분께 추모비에는 두 여중생 부모님들이 주변정리를 하고 있었다. “어! 최 기자 왔어? 또 무엇을 취재하려고…”라며 반겼다.
부모님들은 “미군이 추모비를 세웠다는 이유로 모 시민단체들이 추모비를 홀대하고 또 추모비를 평택으로 보내야 한다네. 요즘 우리 가족들 마음이 무거워”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오전 8시10분께 미군 장병 50여 명이 차에서 내려 추모비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인근 산으로 몸을 숨겼다. 미군은 추모비 앞에 모여 한 부사관으로부터 2002년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정확한 표정을 잡기 위해 추모비로 향했다. 주한 미군은 모두 굳은 표정이었고 일부 장병은 눈시울을 붉혔다.
한 미군이 나에게로 다가와 “기자냐”며 물어왔다. 순간 기자라고 답하면 안 될 것 같아 “I... can’t speak... English”라며 반벙어리처럼 더듬거리며 답했다.
당시 나는 왼쪽 얼굴 말초신경 마비로 인해 눈물이 흘러내리는 등 입이 돌아간 상태라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미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았다. 사진 촬영이 끝난 나는 조심스레 미군에게 접근했다. 이들은 미2사단 캠프 스탠리 소속으로 모두들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끝까지 미군 옆에서 질문한 끝에 한 장병이 “말로만 듣던 사고 현장과 추모비를 찾아 와 보니 당시 두 여중생의 가족은 물론이고 한국 국민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몸소 느끼게 됐다”며 “7년 전 당시 미국에서 한국민들의 촛불시위와 미2사단 앞 등에서 시위하는 것을 TV를 통해 봤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또 “앞으로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희망한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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