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 그리고 진실


   
 
  ▲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  
 
‘왼팔’과 ‘오른팔’을 가르는 경계선은 몸통이고, ‘우측 눈’과 ‘좌측 눈’을 가르는 경계선은 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좌’와 ‘우’를 가르는 경계선은 어디일까? 답은 엿장수 마음대로다. 누군가의 시선이 극단적인 우측으로 치우쳐 있다면 그의 눈에 개혁적 보수는 극좌파이고, 그 시선이 극단적으로 왼쪽에 치우쳐 있다면 합리적 진보는 극우파이다. 같은 논점이라면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는 온통 극좌와 극우가 날뛰는 세상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소위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언론과 ‘한·경·오(오마이뉴스)’로 대표되는 진보언론의 기준은 무엇인가? 신랄하게 말하면 불문곡직 한나라당에 찬성하면 보수언론이고, 사사건건 비판하면 진보언론이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나라 언론의 시선은 이렇게 정당과 정권을 경계선으로 좌와 우로 나뉘어 있다. ‘독자를 대신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할 언론이, 어느 정당이나 정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언론사와 개별 기자의 입장은 다르다. 보수언론에서도 사안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는 기자가 존재하고, 진보언론에서도 논점에 따라 생각이 다른 기자들이 있지만 이들의 공간은 좁다. 언론사란 기본적으로 데스크의 의중이 편집의 기준이 되고, 그것이 전체 기자들의 성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의견을 달리하는 기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나마 언론이 언론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당위다.

그럼에도 최근 언론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분화되면서 이들 기자들의 입지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촛불정국을 거치면서 ‘조·중·동’은 독기를 머금었고, ‘한·경·오’는 앙심을 품었다. 이쯤되면 합리적 목소리를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의 논리가 개인의 논리를 앞서면 의견이 다른 개인은 반역자가 돼 처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언론이 아니다. 언론사는 기자들의 조직이지, 기자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대형(大兄)이 아니다.

이쯤에서 ‘언론은 누구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앞서 말한대로 ‘언론은 세상을 비추는 창’이다. 하지만 그 창이 스테인드글라스마냥 ‘빨,주,노,초,파,남,보’로 색깔이 입혀져 있다면, 언론의 존재 이유는 없다. 왜곡된 시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때문에 언론은 특정 이념이나 정당, 혹은 정권이나 정치인을 위해 복무해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의제를 설정하는 규정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언론은 단지 독자의 권리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는 지금 언론들이 대단히 불편하다. 언론이 독자를 ‘어리석은 대중’으로 규정하고 대중을 가르치려 들거나 선무하려는 움직임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불쾌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원한다. 임의로 자신의 시선이 놓인 지점을 기준으로 ‘좌와 우’를 가르는 언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언론보다 ‘편견없는 사실’을 들려주는 언론을 갈구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진보와 보수, 두 종류의 신문을 동시에 읽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의식을 가진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언론이 비겁한 것이다. 덕분에 신문의 구독자가 이중으로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언론이 원하는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면 ‘둘 중의 하나’, 혹은 ‘둘 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 독자가 어느 쪽도 믿을 수 없어 소위 ‘양쪽’이 전하는 것을 같이 읽어야 한단 말인가? ‘진실’은 단지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박경철 안동 신세계병원장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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