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추·천·작] 신경림 작<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암울한 시절 언로 텄던 88인의 시편들

이경철 중앙일보 문화부 차장





가을이다. 하늘은 높다랗게 푸르고 공기는 맑고 차다. 무성하던 풀이며 나뭇잎은 바삭바삭 타들어가며 곧 스러질 것이다. 아무래도 마음 한 번 겸허하게 추스르길 원하는 계절이다. 이 가을에 지난 30년간 이 땅에서 씌여진 좋은 시들만을 추려 엮은 한 권의 시집이 나왔다.

창작과비평사는 ‘현실 참여시’를 기치로 내걸었던 ‘창비시선’ 200호 기념으로 시인 88명의 시 한 편씩을 실은 시선집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를 펴냈다. 암울했던 지난 연대 맨 앞장에서 ‘발언’해 언로를 텄던 시들도 많아 소위 현장에서 글을 써서 먹고사는 우리 기자들의 자세를 다잡게 한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1974년 유신으로 언로가 꽁꽁 얼어붙은 시절 조태일은 위 시를 표제작으로 한 ‘國土 序詩’를 1975년 펴낸다. 출간되자마자 시집은 물론 판금조치 당했고 시인도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순정한 많은 시인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즐겁게 탄압을 감내해가며 시로써 언로를 불지펴갔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은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0년 5·18 광주학살로 모두가 기가 질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젊은 시인 곽재구 씨는 위 시 ‘사평역에서’로 데뷔했다. 우리는 지금 무서워 아무 소리도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빼어난 서정에 실으며 역설적으로 할 말을 다했던 것이다.

이런 시들이 언로를 앞장서 텄고 우리는 이제 이만큼의 할 말은 할 수 있게 됐다. 올 가을 이런 시들을 읽으며 순정한 활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되돌아봤으면 한다.




이경철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