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외리 기자촌을 아시나요'
겨울 진미 만주.호빵부터 거적문까지, 기자촌 운영회 <기자촌과 나> 펴내
이제는 서울시 진관외동으로 바뀐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 산1번지. 기자협회가 이 곳 황무지와 임야 4만3325평을 깎아내고 다져서 세운 기자촌 생활이 벌써 30년째다.
기자촌운영회는 그동안의 애환이 담긴 <기자촌과 나>라는 책을 펴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안주하기 시작한 원년이 바로 기자촌에서”였던 이정석 전 한국방송개발원이사장 부인 박소현씨는 이제 머리 희끗한 중년 부인이 됐다.
“나도 수도꼭지 빨며 자란 사람”이라는 게 대단한 유세였던 그 시절, 기자촌에 수돗물은 언감생심이었고 입주한 지 5년만에 처음 판 우물물로 지어먹은 저녁밥 맛을 이흥우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이사올 때 박석 고개를 넘으며 마셔 본 공기 맛”에 비교했다.
기자촌 입구 상가에 분식가게를 차려 ‘겨울 안방의 진미…만두·호빵’이라고 써 붙였던 어느 편집기자의 재치는 겨울밤을 훈훈하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따뜻했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자들이 동네를 이루고 살자니 뜬금없는 얘기들이 들렸다. 기자협회가 집터를 닦기 시작할 때부터 “박정희가 기자들에게 집 한 채씩 준다더라”던 뜬소문이 먼저 기자들을 속상하게 했다.
입주도 쉽지는 않았다. 설계도면보다 원고지가 먼저였던 기자들은 세부 설계도도 없이 일단 땅부터 팠다. 융자를 해 준 주택은행의 시정지시, 시공 회사의 부도, 납입금 거부운동으로까지 이어진 영세업자의 부실 공사…. 어느 기자는 문도 달지 않은 집에서 거적문을 달고 노모와 함께 겨울을 나야 했던 가슴 시린 기억도 안고 있다.
‘누구네 저녁 밥상에 뭐가 오르는지’ 훤히 보이는 세간살이도 처음엔 껄끄러웠다.
그렇게 처음 입주했던 420세대는 이제 대부분 떠나가고 43세대만 기자촌의 이름을 지키며 살고 있다.
올해로 62세를 맞는 김영성 관훈클럽 사무국장은 ‘진짜’ 기자촌 토박이 중에 가장 막내라는 이유로 17년째 기자촌운영회장을 맡고있다.
30년 동안 한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기자들, 이재에 무능한 사람이라는 떠나간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이상우 전 경향신문 기획위원은 “우리 집은 등기된 평수가 180평이고 등기 안된 평수가 북한산 250만평” 이라고 껄껄 웃으며 대답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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