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 아이는 없고, 없을 예정이며, 고양이 한 마리를 같이 키운다. 5년 전 내가 먼저 ‘결혼하자’라고 했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다시 생각해봐.” 나는 그 대답이 좋았다. 결혼을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해보고 아니면 그만둘 수 있는 인생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되도록 실패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이 관계의 결말이 좋지 않더라도 그 실패가 각자의 인생을 흔들도록 두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결혼한 사람
‘진영논리’서 독립한 새 언론을 갈망하며
최근 언론단체의 연례 송년모임이 있었다. 이른바 보수·진보 등 여러 성향의 기자들이 함께 자리했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았다는 덕담을 주고 받다가, 그만 “우리 모두가 마치 패잔병 같다”는 넋두리가 나왔다. 공연한 소리를 했는가 싶었는데, 한 동료 기자가 공감을 나타냈다. 다른 기자들도 착잡한 표정이었다. 2019년 한국 언론은 위기다. 언론인 중에 이를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자를 ‘기레기’라고 부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상이 됐다. 언론의 생명인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최근 미국방송인 ‘폭스뉴스’에서 중견기자들이
차량 공유와 기존 상식의 증발
혁신은 멋진 말이다. 하지만 혁신엔 늘 파괴가 뒤따른다. 혁신 상품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순간 누군가는 무대 뒤로 쓸쓸하게 사라진다. 그러다보니 혁신을 둘러싼 갈등은 필연적이다.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뜨겁게 이어지고 있는 ‘타다 공방’도 비슷한 문제다. 표면적인 모습은 타다의 서비스 실체가 자동차 대여사업이냐, 운송사업이냐를 둘러싼 논쟁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국 막대한 투자를 한 기존 사업자의 기득권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 것이냐는 부분과 적잖은 관련이 있다. 물론 전통 산업의 기득권도 존중해야 한다.…
기자도 상어 춤을 춥시다
워싱턴 내셔널스가 2019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창단 50년만에 첫 우승한 기념으로 구단 연고지 미국 워싱턴 D.C.에선 도심 퍼레이드 등 각종 환영 행사가 열렸다. 그때마다 헤라르도 파라(32)가 맨 앞에 서서 트로피를 자랑했다. 그의 월드시리즈 성적은? 대타로 타석에 3번 나와 삼진 두 차례, 볼넷 한 번 얻은게 전부. 그런데도 자타공인 우승 주역으로 대접받는다. 베네수엘라 출신인 파라는 올 봄 방출 선수 신분으로 내셔널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당시 내셔널스는 연패를 거듭해 데이브 마르티네즈 감독이 경질될 위기였고, 파라는
2019년 대북정책 평가와 과제
2019년 대북 정책은 매우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2018년에 긍정적인 사태 변화가 쏟아졌었기 때문에 실망감은 더욱 크다. 그렇지만, 실망감에 위축되기보다는 사태 악화 원인과 대응책을 규명하는 노력에 나서야할 것이다. 필자는 1년 전 대북 정책을 가상의 “철인 7종 경기”로 비유해서 평가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문제 진단과 처방을 탐색해본다. 첫째, 남북 관계 관리. 문재인 정부는 2월 말 하노이 회담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보여준 실망과 좌절, 분노로 촉발된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남북 간 신
빅테크(Big Tech)의 공습과 은행의 몰락
은행의 자취는 기원전 17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이 공표한 함무라비 법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세계 최초의 성문법전에는 재산의 기탁 외에도 기탁된 재산의 운용이나 그에 따른 이자에 대한 규정까지 명시돼 있다. 최초의 근대 은행은 네덜란드 상인인 요한 팔름스트루흐가 1657년 스웨덴에 설립한 ‘스톡홀름스 방코’다. 단순하게 금이나 은 등을 보관하는 기능을 넘어 예금과 대출을 선보였다. 단기로 예금을 받아 장기 대출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대출을 승인하면서 예금 상환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모자이크의 시대
2019년 10월23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했다. 언론사들은 둘로 나뉘었다. 정 교수의 얼굴을 모자이크나 블러(blur·흐리게 하기) 처리한 매체, 정 교수의 사진을 그대로 드러낸 매체 이렇게 두 종류다. 일각에선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없도록 한 매체들을 두고 '피의자 신분으로 포토라인에 선 자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 특혜를 줬다'며 비판했다.형사피의자의 얼굴 공개와 관련해 '한국기자협회 인권보도준칙'이 있다. 구속력은 없다. 준칙은 '헌법 제27
성범죄에 관대한 사회
75기가짜리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에는 ‘여자애들’이라는 폴더가 있었다. 도서관 한층은 거뜬히 채울 수 있는 용량이었다. 밝혀진 것만 30건이 넘는 연쇄 강간범의 집에서 압수한 전자기기였다. 폴더 안에는 앰버·세라·릴리처럼 각각 이름이 붙어 있었다. 추가 피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이었지만 정작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직 뚫는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트루크립트’라는 소프트웨어로 암호화 돼 있었기 때문이다. 수사팀은 플리바게닝(유죄협상)을 시도한다. HDD 암호를 주면 강간 외 혐의는 묻지 않겠다고 했다. 범인은 거절한다. 수사
5년째 ‘이재용 수렁’에 빠져있는 삼성
“삼성이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줘서 늘 감사하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충남 아산 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차세대 디스플레이에 13조 투자계획을 발표한 삼성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6번이나 한 것이 화제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9번 만났는데, 그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감사의 뜻을 밝힌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이 부회장의 뇌물사건 파기환송심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민심에 어긋나고 재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법원은 8월 말 이 부회장에 대
조국 보도와 지혜의 저널리즘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빨갱이 공포’를 유포한 건 언론이었다. 그들은 “정부 고위층에 공산주의자 205명이 침투해 있다”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주장을 그대로 옮겼다. 이런 ‘받아쓰기’ 기사들은 미국 사회에 아픈 상처를 남겼다.늘 궁금했다. 미국 언론의 게이트키핑 시스템은 왜 무기력하게 무너졌을까? 당시 기자들은 매카시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었을까? 미첼 스티븐스의 ‘비욘드 뉴스’에서 그 궁금증을 일부 해소할 수 있었다. “사실에 굶주린 언론은 탐사보도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도 있지만 이용당할 수도 있다.”조국 법무부 장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