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 같은 창작 예술의 영역에선 ‘재현의 윤리’라는 개념을 빌려 작품을 평론한다. 이 기준은 이주민·노동자·재난피해자 등을 다루는 언론 보도에도 적용된다. 누군가의 현실을 그려낼 때 창작자나 취재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윤리적 기준, 즉 현실을 왜곡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도록 요구되는 원칙을 뜻한다.
하물며 언어라는 기본적 사회규범조차 시적허용하는 예술의 영역에서 재현의 윤리가 요구된다면, 정치와 기업은 노동자의 삶을 왜곡하지 않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쿠팡 대표의 새벽배송 ‘체험’은 수많은 쿠팡 산재 노동자의 죽음과 지금도 이어지는 쿠팡 노동자의 삶을 모욕하는 행위에 가깝다.
3월19일 해럴드 로저스 임시대표의 새벽배송 체험이 끝난 뒤, 쿠팡은 유니폼을 입은 그의 모습이 담긴 10장의 사진을 보도자료와 함께 배포했다. 밤새 11시간 일하는 동안 고작 22분을 쉰다는 쿠팡 택배노동자의 현실을 생각하면, 사진 속 계산된 구도와 그의 표정은 실제 노동의 밀도와 거리가 멀었다.
이번 체험은 국회 청문회 당시 불거진 논란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쿠팡은 고객 정보 유출 사태 대책으로 미국 법인 책임자였던 로저스 대표를 임시로 선임했다. 그는 청문회 내내 동문서답과 책임회피를 반복하다 증거인멸·위증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배송 체험은 염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안했지만, 청문회 이후 악화한 여론을 수습하기 위한 행보로 읽혔다.
문제는 3월12일과 19일, 단 이틀간 진행한 그의 체험은 ‘기획된 경험’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숙련된 배송노동자가 아니어도, 그의 체험은 실제 야간노동의 고됨을 체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동행한 염 의원의 MBC 인터뷰에 따르면, 로저스 대표는 배송 지연 예방을 이유로 같은 구역 일평균 물량 대비 58%만 배송했고 휴식시간도 비교적 보장됐다. 또 그는 특수고용직인 퀵플렉서가 아닌 정규직 쿠팡친구와 동행했는데, 퀵플레서 업무인 프레시백 세척 작업도 하지 않았다. 물량·노동강도·휴식시간·업무량 등 모든 부문에서 강도가 조절된 일을 하고도 그는 ‘힘들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체험을 제안한 염 의원도 “평소보다 물량이 적었고 사이사이 걷기도 했지만 굉장히 힘들었다”며 “하루이틀은 어차피 맛보기 체험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토로했다.
로저스 대표의 체험은 지난해 국회 청문회에서 “야간노동이 주간노동보다 힘들다는 증거를 알지 못한다”고 한 그의 발언에서 촉발됐다. 지난해 10월 택배노조가 발표한 쿠팡 퀵플렉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퀵플렉서는 하루 평균 11.1시간을 일하고, 고작 22.6분을 쉰다. 하루 평균 388건의 물건을 배송하고, 야간기사는 2.83회 다회전하며 ‘숨 고를 새 없이’ 일한다. 야간노동의 고됨을 입증할 증거를 모르겠다는 그의 발언은 이미 현장의 수치와 무수한 사고, 수많은 의학적 연구 결과가 반박하고 있다. 통제된 ‘체험’은 배송 지연 압박에 대한 스트레스와 높은 노동강도, 피로가 증대시키는 야간노동의 위험과 본질을 끝내 드러내지 못했다.
그가 배송노동자 유니폼을 입지 않고도, 회사 대표로서 사태에 책임을 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산재 유족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매년 반복되는 냉난방 문제에 대한 개선 약속, 휴대전화조차 반입하지 못하는 몰인권적 일터와 정보 유출에 대한 재발 방지 약속과 책임 있는 사과 등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조치들이다. 그런데 그와 쿠팡은 사과가 아닌 체험이라는 연출을 선택했다.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쿠팡과 로저스는 끝내 그들이 노동자의 삶과 현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데 그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