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도록 국가를 강제하는 문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헌법을 몰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국가가 헌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헌법으로 국가가 아닌 국민을 통제하기도 했다. 그러다 군사정부가 무너지고 시민들이 헌법을 새로 썼다. 이 헌법으로 우리는 국가를 통제해 왔다. 그런데 지금 시민이 만든 헌법이 무력화하고 있다. 헌법을 지키려면 헌법을 알아야 한다. 언론인 출신 헌법학자 이범준 서울대 법학연구소 연구원과 함께 헌법을 읽는다. [편집자주]
0으로 수렴하는 기사의 부가가치
인터넷이 없던 시절 특파원은 현지 신문과 방송을 번역해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만으로도 충분히 기사가 됐다. 그런데 인터넷이 보편화하고 유튜브가 미디어의 주류가 되면서, 현지 언론을 전하는 특파원 보도는 부가가치 없는 상품이 됐다. 뉴욕타임스 같은 외국 신문을 독자가 직접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뉴욕타임스의 2025년 구독자 가운데 94.85%는 디지털 전용 구독자다. 전체 1166만명 가운데 1106만명이다. 참고로 구독(購讀)이란 돈을 내고 읽는다는 뜻이어서 유료 구독은 겹말이다. 이는 구독자가 아닌 사람을 구독자로 부르는 한국 언론이 만든 말이다.
더는 부가가치가 없는 기사가 외신만은 아니다. 과거에는 기상청에서 공짜로 받아온 내일 날씨도 부가가치가 있었고, 3개 면에 걸쳐 싣던 증권시세표도 부가가치가 있었다. 신문을 사지 않은 독자는 오후에 내리는 비를 맞아야 했고, 투자자는 버스를 타고 증권사 객장에 나가야 했다. 이제 부가가치가 있는 기사라고 해도 그 가치는 아주 낮아졌다. 가령 이재명이 지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했다는 개표 결과 기사는 수천수만 개에 이르러, 부가가치는 0에 수렴한다. 이렇게 인터넷 등장으로 미디어에 진입하는 장벽이 사라지고 시장이 세계 규모가 되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출판의 자유도 의미가 바뀌어 가고 있다.
언론 권력의 원천은 내용 아닌 형식
과거 신문과 방송이 가진 권력의 원천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었다. 윤전기와 송출기와 같은 발행 수단이 권력의 토대였다. 헌법 제21조 제3항 “통신·방송의 시설기준과 신문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도 이를 반영한 조항이다. 신문사가 되려면 윤전기가 있어야 했고, 윤전기가 있어야 신문사가 됐다. 윤전기를 법률로 요구했다. ‘타블로이드 2배판 4면 기준의 신문지를 시간당 2만 부 이상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윤전기와 대통령령이 정하는 부수 인쇄시설’이 있어야 한다고 신문법은 정했다. 소수의 신문사만이 이 윤전기를 가지고 있었다. 기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윤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윤전기 기준 조항이 2005년 사라졌다. 사업자로 등록하고 직접 인쇄하거나 대쇄를 맡기면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이후 윤전기를 소유하지 않은 회사가 더 많아졌다. 2019년 현재 한국신문협회 소속 일간지 46개 사 가운데 윤전기를 보유한 곳은 22개 사에 불과하다. 윤전기를 소유한 언론사도 절반 이상을 세워두고 있다. 2022년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윤전기가 경제적 부담에 더해 형사적 부담까지 주어 많은 회사가 처분을 서두르고 있다. 방송사도 비슷하다. 공중파 송출을 위한 값비싼 시스템이 무용지물이다. 공영방송사마저 유튜브 등에 프로그램을 올려 시청자에게 전달한 지 오래됐다.
유튜브 시대와 헌법 제21조
헌법 제2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말하는 언론과 출판이 무엇일까. 일부 학자는 언론은 구두 표현을, 출판은 문자 표현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헌법 제21조가 보호하는 범위가 음악, 영화, 사진, 조각 등 모든 종류의 표현을 뜻한다는 게 헌법재판소 결정이다. 따라서 제21조는 발표할 자유와 전파할 자유로 보는 게 타당하다. 당연하지만 언론·출판의 자유는 언론사와 출판사의 자유가 아니다. 여전히 가장 많이 쓰는 직업 기자와 기성 매체가 중요하지만, 근본은 시민이 표현할 자유이다.
유튜브 시대가 되어 헌법 제21조 제3항 해석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보도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권력과 자본에서 독립한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윤전기 기준 등 법률 조항의 처음 목적은 무색해지고 오히려 언론사 설립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자 이 헌법 조항을 헌법재판소가 새롭게 해석했다. 신문의 기능이 주로 민주적 의사 형성에 있고, 그것은 다원주의를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다양성 보장을 불가결의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제21조 제3항에 있는 ‘신문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하여’란 결국 ‘신문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하여’란 의미라고 했다(2005헌마165 등).
글로벌 시대와 지역 언론 소멸
서울에 앉아 실시간으로 뉴욕타임스를 읽는 시대에, 가장 처지가 어려운 곳은 지역 언론이다. 한국 정치는 압도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이른바 중앙 의제를 다루는 중앙언론도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시장 논리대로라면 지역 언론사가 가장 먼저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5년 동안 문을 닫은 지역신문이 65곳에 이르고, 지역 언론사 76%가 적자이다(한국언론진흥재단 2023년 자료). 국가는 언론 기능의 작동 방식을 시장 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이는 헌법이 정한 언론의 다양성을 위협하는 것이고, 정부가 다양성 소멸을 방치하는 것은 부작위 위헌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지역 언론의 존재는 지역 정치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과 관련이 있다. 헌법은 제8장에서 지방자치를 정하고 있다. 이 지방자치의 중요한 역할은 중앙 권력 견제이다. 그래서 헌법학 교과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지방자치는 국가와 지방과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제도적 장치로 마련되었다. 특히, 권력분립의 측면에서 중앙정부를 통제하는 기능이 강조되면서 지방자치는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이효원, 대한민국 헌법강의, 2024).” 과거 군사정부 시절 오랫동안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은 이유도, 중앙 권력을 독재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지방자치 선거가 1995년에야 겨우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이 예측한 시대의 도착
지면과 전파가 한정된 자원이던 시절 미디어는 편집을 수단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를 통해 언론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엄청난 사건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쓰는 사람이자, 유통하는 사람이고, 읽는 사람인 시대이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1936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경계가 사라져간다고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했다. 소수의 쓰는 사람과 수천 배의 읽는 사람으로 나뉘던 시절에서, 독자도 언제든 필자가 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저자와 대중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성격은 사라지고 있다. 독자는 언제든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한 시대가 왔다.
이런 시대에 기업 형태의 언론사가 계속 살아남을지, 공영 체제의 언론사가 계속 유지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미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사의 표현의 자유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헌법에 따라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것은 의견의 다양성이고 이는 개인의 의견이다. 다만,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아직은 기자의 역할이, 특히 가장 약한 고리인 지역 언론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필자 소개] 이범준
헌법학 박사. 서울대 법학연구소 연구원. 저서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거의 모든 것(2022)>,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2009)> 등이 있다. 기자 시절 대법원 사법농단 비리, 검찰 디지털 개인정보 무기한 저장, 대법원 전자법정 입찰 비리 등을 보도해, 국제앰네스티,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협회 등에서 기자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