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위안부 협상에서 잊어선 안 될 것
정치만 생물이 아니다. 외교도 생물이다. 죽은 듯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살아 꿈틀거린다. 지난주 한·일 관계는 그런 기대감이 번지기에 충분했다.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2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협의와 관련 “상당한 진전이 있었으며 협상의 마지막 단계(final stage)에 이르렀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던 박 대통령의 행보에 비춰볼 때 매우 이례적인 언급이다.일본 측 반응은 아직은 냉랭하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15일 정례브리
바람피운 배우자 이혼재판, 대법원에 쏠린 눈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장희빈과 결혼하겠다고 인현왕후와 헤어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가정법원에 이혼소송을 낼 수는 있겠지만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우리 대법원이 채택하고 있는 ‘유책주의’ 판례 때문입니다. 유책주의는 이혼할 때 상대방의 책임을 따져 묻는 재판상 이혼의 한 방식입니다. 부부 간에 지켜야 할 동거·부양·정조의 의무가 있고 이를 어길 경우에만 재판을 통해 이혼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이죠. 우리 민법 840조에는 재판상 이혼 원인을 6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배우자에게 부정행위가 있었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향한 고언
삼성발 빅뱅(대규모 사업개편)이 경제계의 화두다.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발표에 이어 대규모 추가 사업개편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삼성전자의 삼성SDS 합병설은 그 중 하나다. 합병 수혜주로 꼽히는 SDS의 주가는 5월 한달간 30% 이상 크게 올랐다.하지만 ‘머니게임’이 사업개편의 본질은 아니다.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보도자료에서 사업 시너지를 강조했다. 하지만 삼성이 불과 얼마 전 시너지가 없다며 합병설을 부인한 것을 기억하는 투자자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방배 경찰서의 도서관 습격사건
방배경찰서의 도서관 습격사건이라고 들어보셨는지. 최근 A도서관에서 들은 ‘웃픈’ 이야기다. 말 그대로 방배경찰서 기동대에서 A도서관으로 출동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열람실 같은 자리로 매일 ‘개근’하다시피 하는 할아버지와 청년의 자리싸움이 주먹다짐까지 확대됐다는 것이다. 항상 앉는 자리라며 방심한 할아버지가 필통만 하나 덜렁 올려놓고 외출한 사이, 그 자리에 젊은이가 와서 앉았다는 것. 내 자리다, 도서관에 개인 자리가 어디 있느냐, 시비가 붙어 버렸다.관련 이야기를 기사로 썼더니 역시 세대별로 반응이 달랐다. 중장년 세대는 아무래
성완종 파문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즘 해외 바이어들을 만날 때면 고개를 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해외 출장이 잦은 한 기업인이 들려준 얘기다. ‘검찰의 기업 사정’이나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대해 종종 물어오기 때문이란다. 해외 업체는 여기에 연루된 기업과는 거래를 피하기 위해 묻는다지만, 질문을 받는 한국 기업인으로선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자괴감의 발로만은 아니다.한국 주식시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는 낙인을 갖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시장 가치가 다른 나라 기업 가치에 비해 저평가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
최고의 품격! 위로를 팝니다?
“자, 이제부터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을 함께 시작해보겠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놀이공원에서 들을 법한 얘기가 ‘마크 로스코전’의 오디오 가이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 말은 연극 ‘레드’의 대사다. 하지만 맥락 없는 인용 탓에 느닷없게 들리고 말았다. 전시장 벽에는 작가의 어록과 작품 설명이 빼곡히 들어찼다. 눈을 감고 명상하라, 자리에 앉아 명상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배우 유지태가 녹음한 오디오 가이드를 들려주며 “이 그림이 바로 위로를 주는 치유의 그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한 시간 이
사쿠라에 취한 워싱턴과 한국외교
벚꽃에 흠뻑 취해버렸다. 벚꽃 마츠리(벚꽃축제)에 들뜬 일본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미국의 워싱턴DC를 놓고 하는 이야기다.매년 4월 워싱턴은 벚꽃에 휩싸인다. 워싱턴시 주위를 흐르는 포토맥 강을 따라 3700그루가 피워내는 벚꽃 물결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워싱턴 시민과 관광객들은 이 화려하고 이국적인 꽃을 보며 봄의 정취를 만끽한다. 매년 시 관광 수입의 35%를 벚꽃축제 기간에 거둬들일 정도로 워싱턴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그런데 워싱턴의 벚나무들은 미국 대륙에는 없던 식물이다. 일본산 벚나무가 워싱턴에 들어온 것은 불과 7
알리샤 검사장을 찾아온 그들
사무실 문을 열자 샴페인과 꽃을 비롯한 온갖 선물들이 그를 맞이합니다. 알리샤 플로릭 주 검사장. 6년 전 순진무구한 전업주부였던 그에게 주 검사장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로펌 동료들의 환호도 잠시, 불편한 손님들이 줄줄이 찾아옵니다. 갑부 레드메인은 검찰청의 차장검사로 자신이 선호하는 변호사를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마약왕’ 비숍은 진행 중인 자신에 대한 수사를 멈춰달라 요구하죠. 하루 전만해도 그들은 모두 알리샤의 당선을 위해 정치자금을 대주던 ‘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채권자’로 돌변한 그들의
대통령과 언론부터 바뀌어야 산다
“성완종 스캔들로 모든 경제 이슈들이 실종됐다.”경제5단체의 한 상근부회장이 최근 기자와 만나 탄식하며 한 말이다. 노동시장 개혁, 공무원 연금개혁, 복지와 증세 논란, 최저임금 인상, 일자리 창출, 저물가와 저성장이 병행하는 디플레이션 등 당면한 경제사회 현안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많은 경제인들은 개혁을 위한 ‘골든타임’을 또 다시 허송세월하게 됐다고 허탈해한다.그럼에도 내일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면 다시 힘을 내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사회적 대타협밖에 없다는 데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최근…
14만권의 책은 그렇게 하늘로 간다
4월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 오래 됐다. 그 기원이 셰익스피어(1564~1616)와 세르반테스(1547~1616)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영국과 스페인의 대 문호가 공교롭게도 같은 해 같은 날 세상을 떠났고, 스페인 축제 전통 중에는 이날 즈음 남자는 꽃 한 송이를, 여자는 책 한 권을 서로에게 선물했던 풍습이 있다. 말 그대로 소박한 선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출판인회의나 교보문고 등이 책을 사는 독자들에게 장미 꽃 한 송이를 선물하는 작은 축제를 열곤 한다.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세계 책의 수도(World Boo
스마트카가 몰고올 보험업계의 위기
산업 생태계는 단절의 패러다임 위에 서 있다. 도입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로 이어지는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은 파괴된 지 오래다. 완전히 새로운 산업 환경을 만드는 소위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제품이 등장해 단숨에 시장 판도를 뒤집기 때문이다.스마트폰의 등장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휴대폰 제국 노키아를 한순간에 몰락시켰다. 워크맨 돌풍을 일으키며 ‘혁신’의 상징으로 통하던 소니도 MP3플레이어가 나오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131년 전통의 세계 1위 필름 기업이었던 이스트먼코닥도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한 뒤 2
일상에 꽃 하나, 이게 행복
새벽 3시인데 죽어라 잠이 오질 않는다. 이럴 땐 미련 없이 일어나야 한다. 모두가 잠든 도시의 새벽, 나는 차 안 가득 음악을 머금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입구부터 밀려오는 특유의 냄새. 꽃향기와 풀 냄새, 물비린내 그리고 라면, 찌개 등 상인들의 밤참이 뒤섞인 ‘삶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좀 지나갑시다!’ 머뭇거리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그만 놀라 엉거주춤 들어서게 되는 곳. 커다란 상자를 나르는 발걸음이 분주하고, 부스스한 얼굴로 저마다의 꽃을 찾는 눈빛들이 엉키는 곳. 이 은밀한 세계는 바로 도시의 살아있는 밤
리콴유와 用美用中 외교
또 한명의 ‘거인’이 우리곁을 떠났다.싱가포르 국부이자 아세안의 창립자 중 한명인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23일 새벽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리 전 총리의 죽음에 대해 세계 각국이 애도의 성명을 내놓고 있다. 최근 국제 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얼굴을 붉히고 있는 G2(주요 2개국)도 예외는 아니다.재밌는 것은 이들 미·중 양국 수장의 애도사에 드러난 공통의 표현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 시각) 백악관 성명을 통해 “나는 리콴유 전 총리의 타계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한다”며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이자 아시아의
드라마 ‘펀치’와 ‘벤츠 여검사’
“법은 하나야. 나한테도, 당신한테도….” 지난 달 종영한 드라마 ‘펀치’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늘 정의로운 말을 입에서 쏟아내지만 하는 행동은 자신이 거악(巨惡)으로 규정한 이태준 검찰총장(조재현 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게 없었던 윤지숙 법무부 장관(최명길 분)의 말입니다. 온갖 악행을 일삼은 탓에 결국 드라마 말미에 자신이 했던 대사대로 법의 처분을 받아 몰락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많은 시청자들이 통쾌해했습니다.이 드라마는 서초동 법조단지에서도 제법 반향이 컸습니다. 검사들은 물론이고 판사·변호사들의 술자리에서도 자주 언급
김영란법 탓하기 앞서 자정노력 시작할 때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법)이 지난 3일 국회를 통과한 뒤 논란이 뜨겁다. 과잉입법, 형평성 상실 등을 이유로 비판이 쏟아지고, 일부에선 위헌소지 주장이 나온다. ‘공직자’범위에 언론 종사자까지 포함시킨 것에 대해 권력이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며 언론자유 침해 우려까지 제기된다. 반대로 애초 김영란법의 핵심취지 중 하나였던 ‘이해충돌 방지’(공직자의 지위·권한을 이용한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 도모 금지)가 통째로 빠진 것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공직사회의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시대적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