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나를 바꾸고, 나는 삶을 바꾼다
곧 나올 책의 서문을 쓰다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입학 후 한 학기를 마저 채우지 못하고 떠났던 가족의 이사.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갔던 7세 소년은 이사 당일 증발했다. 포장이사가 아직 미래의 용어였던 시절, 짐 나르느라 정신없던 부모는 아들의 잠적 혹은 납치를 눈치 채지 못했다. 뒤늦게 파악한 사태의 심각성. 생면부지의 동네에서 초등 1학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스마트폰은커녕 삐삐도 없던 1970년대, 당황한 부친과 모친은 미아신고까지 마치고 반경 3㎞ 골목길을 헤집었다. 낙담한 부모의 분노가 두려움으로 바뀌던
마이너스 금리와 화폐의 사망
‘은행에 예금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 대출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갚아야 할 원리금이 줄어든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나 나올 법한 소설 같은 얘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마이너스 금리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2014년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선언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양적완화(QE)가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잃자 꺼내든 특별 조치다. 이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했다. 이들 국가의 일부 장기국채 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
후진적 기업문화 혁신, 언론은 예외인가?
대기업들이 앞다퉈 후진적 조직문화 혁신에 나서고 있다. 재계 1위 삼성은 최근 글로벌 기업에 걸맞게 의식과 근로문화를 탈바꿈하기 위한 ‘스타트업 컬처혁신’을 발표했다. 수평적 조직문화 구축, 업무 생산성 제고 등 3대 혁신전략을 내놓았다. 열린 소통과 지속적 혁신이 가능한 조직문화로 바꾸겠다는 취지다. 재계 4위 LG도 1월부터 일종의 온라인 제안제도인 ‘우리 틉시다’를 시행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현행 5단계 직급체계도 역할 중심으로 바꿀 계획이다.대기업들의 조직문화 혁신 배경에는 현행 상명하복 위주의 폐쇄적 조직문화로는 기업 발전
‘누가 보고 있지 말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우리 부부는 시청에서 종이 한 장을 받아들고 끙끙대고 있었다. 둘이 하는 결혼인데 국가는 원하는 정보가 많았다. 나와 아내의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만 적어냈다. 부모님과 장인·장모님의 주민번호는 욀 턱이 없었고, 등록기준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아는 데까지만 적었습니다.” 시청직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적다 만 신고서를 다시 돌려줬다. “이거 보고 마저 쓰세요.” 직원은 가족관계증명서를 뽑아 나와 아내에게 건넸다. 증명서에는 우리가 빈 칸으로 남겨둔 곳에 써 넣어야 할 정보들이
한·일 양국의 뒤바뀐 야권지형
일본 열도의 정치 지각판이 꿈틀거리고 있다. 오는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시작됐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의 정치판 상황이 한국과 매우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제3당의 원내 세력화에 정치 생명을 걸고 도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4·13 총선은 이변이 없는 한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로 치러질 전망이다.하지만 일본에서는 지난 14일 제1야당인 민주당과 제3야당인 유신당이 통합에 전격 합의했다. 오는 27일 민진당이라는 새 당명으로 일본판 야권
사랑은 여행과 닮았다
낯선 공간은 늘 매력적이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 속을 거닐다 몇 평 남짓의 카페에 들어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순간의 기억은 의외로 강렬하고 또렷하게 새겨진다. 그 낯설음과 두근거림의 중간 어느지점을 오갈 무렵, 내 감정을 파고드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면 오죽할까. 엇갈리는 눈빛 속, 처음 건넨 말 한마디는 익숙했던 서울 어느 거리에서의 낯선 이들을 스칠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프랑스 남부의 한 마을로 향하던 기차 안. 프랑스어로 가득했던 공간에서 또렷한 발음으로 ‘홍상수’를 안다며 내게 말을 건 동갑내기 터키 친구와의 인연은
삼성-애플 특허소송 제대로 보기
특허소송 보도를 할 땐 흔히 승부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물론 승부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때론 겉으로 드러난 승부 못지않게 밑에 깔린 논리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엔 삼성과 애플 간 2차 특허소송이 딱 그렇다. 잘 아는 것처럼 삼성은 애플과 2차 특허소송 항소심에서 역전승했다. 연방항소법원이 삼성의 데이터 태핑(647 특허) 특허 침해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했다. 또 오타 자동수정(172 특허)과 밀어서 잠금 해제(721 특허) 등 애플 특허 두 건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것만 해도 굉장히 뉴스 가치가 큰 사안
‘루트 66’을 달리며 기자생활 20년을 돌아보다
냇 킹 콜의 ‘루트 66’은 이렇게 시작한다.“If you ever plan to motor west,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갈 계획이라면) Travel my way, take the highway that’s the best.(내가 권하는 길로 가세요. 최고의 고속도로를 타세요) Get your kicks on route sixty-six.(66번 국도를 신나게 달리세요.)” 대북 핵무장론이 전면에 등장하고, 새누리당 경선이 ‘유령당원’ 논란에 시달리며, 침체된 스마트폰 시장이 VR(가상현실)로 한계를 돌파하려는 이 엄중한 시
금융시장에 울리는 카나리아의 경고
맑고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 카나리아는 산소가 부족하면 죽는 새다. 옛날 광부들은 탄광 속의 잔존 산소량을 알아보기 위해 카나리아를 데리고 들어가곤 했다. 탄광 속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노래를 멈추고 먼저 탄광 밖으로 도망가기 때문이다. 앞으로 불어 닥칠 위기를 예고하는 전조를 ‘탄광 속 카나리아’라고 부르는 이유다. 위기는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중국 증시 폭락과 유가 급락으로 ELS(주가연계증권)와 원유 ETF(상장지수펀드)가 원금 손실 구간에 진입하면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 ELS 위기와 원유 ETF의 몰락은 파생시
대통령의 리더십과 저성과자
저성과자 해고,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이른바 양대지침 추진을 둘러싸고 정부와 노동계의 공방이 뜨겁다.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노동계는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처들이라며, 지침이 시행되면 ‘저성과자 해고 1번’은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대통령의 실적 평가 중 가장 많이 쓰인 방법은 집권 기간 중 경제성장률, 실업률 등 경제지표 비교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노동계 주장이 아주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성장률의 경우 박근혜 정부 3년 평균은 2.9%로, 노무현 정부의 4.4%,
약속된 기준과 신뢰
법조를 출입한 지 3년 반이 지났다. ‘기각’과 ‘각하’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던 풋내기는 이제 제법 법률용어를 들먹이며 취재원들과 말을 섞는 수준이 됐다. 그동안 만난 법조인들은 취재원이기 이전에 교사였다. 가끔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법의 오묘한 정신을 그들은 인내를 갖고 설명했다.‘예측가능성’이란 개념이 그 중 하나였다. 쉽게 말하면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얼마나 처벌받게 되는지’를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트집을 잡아보려는 고약한 심보가 있어 대뜸 말했다. “이런 죄는 처벌이 가벼우니 저질러도…
린치핀과 항공모함, 그리고 한국외교
‘린치핀과 항공모함’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지 모른다. 린치핀(linchpin)은 마차나 수레, 자동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축에 꽂는 핀이다. 항공모함은 말그대로 바다에 떠 있는 군사비행장이다. 언뜻 소나무와 기차처럼 별 관계없는 단어 조합이다.하지만 이 두 단어는 북한의 4차 핵실험이 벌어지기 전까지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는 키워드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성명에서 “한·미 동맹은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체 안보의 린치핀”이라고 강조했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는 그런 단어가 있다. 따뜻했던 바람, 한낮의 햇살, 말없이 함께하던 발걸음과 그림자… 그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내게 그런 단어는 ‘부암동’이다. 바람과 햇살이 말없이 지나는 언덕과 길목들은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익숙했다. 복작복작한 서울에서 가장 천천히, 그리고 느릿한 풍광을 간직한 동네. 매력적인 공간들이 늘 그러하듯, 낯선 카페와 저택들이 하나 둘 들어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 부암동에는 느릿한 걸음들이 어울린다. 취재가 일상이 된 하루하루, 많은 것이 그저 익숙해져 용기와 생각들이 빛을 잃어가던
잊힐 권리와 잊히지 않을 각오
최근 강원도가 홈페이지에 도입한 ‘타이머’ 기능이 화제다. 타이머는 사용자가 올린 콘텐츠의 소멸 시효를 직접 정할 수 있도록 한 기능이다. 강원도의 타이머는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잊힐 권리와 맞물리면서 더 주목을 받았다.잊힐 권리란 무심코 올린 글이나 사진 때문에 생긴 피해를 막기 위해 논의되는 이슈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글에 대해선 당사자가 삭제 요청할 권리를 주자는것이다. 특히 지난 2014년 5월 유럽연합(EU) 최고재판소가 잊힐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하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국내에서도 법 제정 작업을 진행하고
광화문 부대찌개 할머니의 메리 크리스마스
철모르던 유년시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역시 직장을 다닌다면 광화문이 아니겠냐고. 80년 즈음, 셈 빠른 엄마따라 강남 전학가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목격하면서도, 역시 서울의 핵심은 광화문이라는 판타지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광화문에서 신문사를 다닌 지 20년이 넘었다. 얼마 전 좋아하는 부대찌개 집을 찾았다가 비보를 들었다. 그 주말부터 장사를 접는다는 소식이었다. 5년전 쯤, 맛집 칼럼을 쓰던 당시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집이었다. 경찰청 뒷골목에 자리잡은 소박한 식당인데, 칠순 할머니가 역시 칠순 즈음 여동생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