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의 유업에 사로잡힌 동북아 정치
최고 권력자들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자기 가문의 유업을 이루기 위해 역사 역주행의 가속 페달을 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최근 한반도와 그 주변의 답답한 상황이다.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가 큰 맥락에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의 유훈통치를 펼치고 있다. 인민들에게 김일성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려는 듯 할아버지의 걸음걸이와 연설 제
‘좋아하는’ 일과 ‘작은’ 성공
최근 동덕여대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2학년 학생 450명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의였는데, 당연히 처음에는 사양했다. 여고 문예반 시화전에 초대받았다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던 고교 시절의 참사가 생각나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소위 ‘헬조선’ 시대를 살고 있다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말이 아득해서였다는 게 정직한 이유일 것이다.특강 청탁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곳은 통영의 작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었다. 얼마 전 기사로도 인용했지만, 2년 전 경남 통영의 이 작고 예쁜 출판사를 찾아간 적이
싸이월드 : 흔적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글렌굴드의 골든베르그 변주곡은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20여 년 전 우리 집엔 무려 100장이 넘는 클래식 전집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건’이 있었다. 새롭게 일을 시작한 엄마 친구가 장기할부로 떠맡기면서 엉겁결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교향곡보다는 독주에 끌렸고, 유독 글렌굴드의 피아노 음반에 손이 갔다. 피아노 소리 저 어디선가 흐느낌이 들려 귀신 소리인지 환청인지 싶고, 특히 밤에 혼자 들을 때면 살짝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음반, 이른바 ‘굴
금융 vs IT : 융합없는 핀테크 정책
핀테크(FinTech)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핀테크란 금융을 뜻하는 파이낸셜(financial)과 기술(technique)의 합성어. 모바일 결제 및 송금, 크라우드 펀딩 등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금융 기술을 말한다.미래 부가가치 산업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핀테크를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 애플과 한국 삼성이 각각 모바일 결제 서비스인 ‘애플페이’와 ‘삼성페이’를 내놨고, 구글과 페이스북도 자체 금융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전문은행은 핀테크의 결정판으로 통한다. 미국과 일
세실과 쿠르디 그리고 국제여론
국제부에서 일하다 보면 보도사진의 위력을 실감할 때가 적지 않다.전쟁과 기아, 시위, 환경오염, 자연재난 등에 대해 장문의 기사나 보도영상을 쏟아내도 꿈쩍도 하지않던 여론이 스틸사진 한 장에 성난 파도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떠드는 것보다 사진 한 장이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최근 시리아 난민 꼬마 에이란 쿠르디를 통해 다시 한 번 사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소형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행 피난길에 올랐던 세 살배기 쿠르디는 터키 휴양지 보
모든 성범죄가 ‘김길태’ ‘조두순’은 아닐텐데
성범죄와 관련된 기사는 매일 오전 열리는 편집국 회의에서 가장 채택되기 쉬운 주제다. 그동안 성범죄 처벌에 관대했다는 전국민적 반성은 현재진행형이다. ‘조회수’로 이어지는 공분(公憤)을 확보하기도 수월하다. 기사의 방향은 미리 정해져 있다. 형량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면 법원을 비판하면 되고, 형량이 적당하다 판단되면 범죄자를 ‘죽일 놈’으로 만들면 된다. 앞의 경우에는 ‘솜방망이 판결’, 뒤에는 ‘인면수심 성범죄자’라는 제목이 달릴 것이다.언론이 ‘조회수’를 먹고 살듯이 ‘표’를 먹고 사는 국회의원들의 인식구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와 경영계는 노동개혁을 할 생각이 있나
보수-진보, 노-사, 여-야 모두 저성장과 고용대란을 해결하려면 노동시장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노총도 결국 노사정위원회 복귀를 결정했다. 하지만 노동시장 개혁에 성공할 것으로 낙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 않다. 최경환 부총리는 최근 언론사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부가 내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전인 10일까지 노사정위원회가 노동시장 구조개혁 관련한 합의를 이뤄달라”고 공개 요청했다. 노동시장의 질서를 새로 짜는 중차대한 논의를 불과 열흘 안에 끝내라는 억지다. 노동계에서는 벌써 고무도장 역할이나 하라는 얘기
문화부 기자가 ‘회장님’을 부러워할 때
군산에 다녀왔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임원선)의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인문 강연과 현지 답사를 병행하는 연간 프로그램인데, 8월 강연이 기자의 차례였다.일제강점기와 근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 개항지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8월의 공간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가장 컸지만, 군산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한 잡지 때문이었다. LS네트웍스가 계간으로 발행하고 있는 무가지 ‘보보담’이다. ‘보보담(步步譚)’은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는 뜻. LS네트웍스가 프로스펙스, 몽벨, 잭 울프스킨…
롯데그룹의 ‘손가락 경영’과 주먹 규제
롯데는 ‘꿈’을 파는 기업이다. 롯데가 사업 초창기인 1950년대 내놨던 대나무 파이프가 달린 풍선껌은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씹은 껌을 대나무 파이프에 붙여 불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풍선껌을 사기 위해 아이들은 엄마 손을 끌고 가게에 줄을 섰다. 롯데는 1967년 한국 껌 시장에 후발주자로 들어왔지만 “입속의 연인, 롯데껌~”이란 감성적인 광고 카피를 히트시키며 시장을 장악했다. 껌을 팔아 번 돈으로 지은 초대형 복합레저·엔터테인먼트 시설 롯데월드는 아이들에겐 꿈을, 젊은이들에겐 낭만을, 가족
냄새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혼자 그림을 그리다 보면 수시로 고비가 찾아온다. 막막함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고민 끝에 7살 아들의 미술 선생님께 잠시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슬럼프에 빠진 내가 받은 제안은 놀랍게도 ‘오일 파스텔’을 시도해 보라는 것. 쉽게 말하면, 어릴 적 누구나 써봤던 ‘크레파스’로 그려보라는 얘기다. ‘이 나이에 무슨 크레파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신세계다. 쓱쓱 칠하고, 틀리면 그 위에 또 칠하고, 물도 기름도 필요 없고, 간편하기 그지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때론 수채화처럼 영롱하고, 때론 유화처럼 깊은 맛을…
아베의 폭주, 일본 젊은세대를 깨우다
푹푹 찌는 폭염 속에서도 일본 열도가 연일 시위로 들끓고 있다. 지난 15, 16일 일본 중의원(하원) 특별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아베 정권이 ‘전쟁할 수 있는 국가’ 규정을 담은 안전보장 관련법안을 단독으로 강행 처리하면서다. 일본 전역에서 시민들이 ‘아베 정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종이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1970년대 학생운동의 물결이 퇴조한 이후 깊은 잠에 빠졌던 일본 시민사회의 저항 의식이 다시 눈을 뜬 것처럼 보인다.재미있는 것은 시위대의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외신을 타고 들어온 집회 사진을 보면 연령
언론은 왜 국수주의로 빠지나
최근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하는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책임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고민을 공유했으면 한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의 불공정한 합병비율로 물산 주주들이 피해를 본다며 삼성과 대립 중이다. 삼성은 한국의 대표기업이다. 삼성이 단기고수익투자를 쫓는 헤지펀드에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할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욱이 2000년대 이후 한국기업을 공격한 소버린, 칼아이칸 등의 헤지펀드들은 국민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지 못했다. 헤지펀드들의 먹튀(단기에 주가가 오르면 주식을
신문 책 지면은 왜 비슷하냐고 묻는 당신에게
지난 주 어떤 외부 특강에서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하다가 이런 도전적 질문을 받았다. “왜 일간신문의 북섹션(혹은 책 지면)은 대체로 비슷한 건가요. 혹시 메이저 출판사들의 로비 때문인가요.”한 번 만들어진 프레임과 선입견은 이렇게 강력하다. 신문 책 지면을 꼼꼼하게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올해 상반기 일간신문의 토요일자 책 지면에서 겹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읽지는 않고 쓰려고만 하는 요즘 세태의 반영이었을까. 물론 함무라비 법전은 나의 바이블이 아니므로 이런 반박은 하지 않았다.조선일보 책 팀장을 새로 맡은 지 6개월이
삼성 VS 엘리엇, 거대한 전쟁의 ‘서막’
‘헤지펀드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smartest) 거친(toughest) 펀드매니저.’엘리엇매니지먼트를 이끄는 폴 싱어 회장에 대한 국제 자본시장의 평가다. 이런 폴 싱어 회장이 삼성의 아킬레스건을 물었다. 지난 3월부터 삼성물산 주식을 비밀리에 매집한 뒤 지난달 말 삼성물산이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을 발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합병 비율이 불공정하다”며 경영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일각에선 엘리엇이 ‘단기 먹튀’를 노리고 합병에 반대에 나섰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폴 싱어 회장이 왜 헤지펀드 업계에서 가장 거칠다는 평
우리에겐 없을까? 디올·샤넬 그리고 맥퀸
# 퀴즈. 1. 해골 무늬 2. 김희선이 앙드레김 빈소에 두르고 갔다가 구설수에 올랐던 스카프. 답은 영국이 자랑하는 천재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이다.# 4년 전 이맘때를 떠올려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앞, 구불구불 긴 줄이 건물 밖까지 나와 있다. 알렉산더 맥퀸을 기리는 회고전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 반바지에 민소매, 폴로셔츠 차림, 얼핏 맥퀸의 그로테스크하고 멋스런 옷과는 관련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서너 시간 넘는 긴 줄서기를 기꺼이 감수했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은 물론 시민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