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산업의 혼종 혁신 역사
최초로 산업화된 매스 미디어는 영화였다. 미국 최초의 영화 제작자였던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영화사는 1910년대까지 미국 영화 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퉜다. 하지만 할리우드를 꽃피운 것은 영화 산업 아웃사이더였다. 모피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아돌프 주커(Adolph Zuckor)는 희가극을 공연하는 극장을 운영했다. 당시 태동하던 영화를 상영하면서 그는 관객들의 선호와 공급되는 영화간 괴리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소유 극장 4곳을 팔아버리고 3년간 전국을 돌며 영화 관객의 반응을 관찰했다. 일종의 관객 데이터를 수집한 것이
김의겸의 공영포털이 안되는 이유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이 정부주도의 공공포털(공영포털 혹은 열린뉴스포털)을 최근 제안했다. 정부가 재정을 지원해 제3의 포털뉴스사이트를 만들고 학계시민단체언론사로 구성된 편집위원회가 양질의 뉴스를 노출시키자는 제안이다. 공영포털에 들어오는 언론사에는 정부광고를 우선집행하는 유인책도 내놓았다. 김 의원은 현재의 포털은 일종의 정치적 포르노에 비유할 수 있다. 가학성과 선정성, 패륜적 조롱에 타락했고, 질낮은 기사가 모이고 고여 악취를 풍긴다고 말했다. 비유가 심하긴 하지만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 대안이 정부주도 포털이라는 게 당
정치와 언론의 합작품이 낳은 슬픈 풍경
진영논리라고들 하는데, 아예 진영이 없이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세상의 원리를 다 알지 못하는데 세상만사 모든 것을 어떻게 혼자서만 판단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세상이 진영논리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는 진영과 그것에 속한 이들의 어떤 특정한 측면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반대할 대상을 정해놓고 반대를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총력전의 정치에 있다.김어준씨와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은 정치권 초미의 관심사다. 보수야당은 거의 모든 논리를 동원해 김어준씨의 퇴출을 주장한다.실제 저널리즘의 기준으로 볼 때 김어준씨의 활동은 문제가 심
화석연료에서 산업경쟁력을 찾지 마시라
기후변화 이슈에서 언론의 역할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설파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기후위기가 몰고 올 산업생태계의 변화를 포착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또한 언론의 책무다.한국 언론은 기후위기 시대의 책무를 다하고 있을까. 방향 제시는커녕 변화를 막는 장벽이 되진 않았나. 매일경제는 4월12일자 석탄발전 수출, 이젠 금융지원 없다(1면)에서 정부가 곧 있을 기후 정상회담에서 해외석탄발전에 대한 금전 지원 중단 방침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기사에선 이번 결정이 석탄발전 산업생태계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지난 여
오늘도 여성이 살해당하고 있다
세 모녀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살해 용의자는 현장에서 자해한 상태로 시신과 함께 발견됐다. 충격적인 사건의 경찰 수사결과는 언론을 통해 매일 조금씩 더 알려졌다.수사권이 없는 기자들은 경찰의 발표를 좇아갈 수밖에 없다. 사건에 쏠리는 관심이 커지면서, 경찰이 피의자로부터 확보한 진술 하나하나가 기사가 된다. 24시간 속보를 쏟아내는 온라인 환경에서 취재 경쟁이 심할수록 기사의 파편화는 더 심해진다.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으로 불리다가 가해자의 신상이 공개된 뒤 김태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건. 사건의 첫 보도 이후, 앞
직업으로서의 기자
수습 때부터 알고 지내며 지금도 종종 만나는 타사 동료기자에게 들은 말이다. 나이가 들어 (지방의)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 몇 번 나간 적 있다. 처음엔 옛날 이야기 하다, 그 다음엔 주식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돈 번 이야기, 바람 핀 이야기, 내가 낄 곳이 없고 재미가 없더라. 우리는 그래도 나라 걱정, 세상 걱정 이야기 하지 않느냐고. 세상의 모든 동문 모임들이 다 그러진 않으리라 생각한다.기자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이 기자들이다. 기자들의 많은 특징 중 하나는 잘난 척이다. 잘난 척에 남녀
#MeToo 그 후… 어떻게 보도하느냐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가 여성이 많은 이사회는 회의 진행에 시간이 걸린다 등의 발언으로 여성 비하라는 비판을 받고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난 이후 일본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성평등에 관한 보도나 특집이 늘어나고 있다. 이웃나라 한국에서는 어떤지 나에게 한국의 성평등 관련 취재 의뢰가 들어왔을 정도다. 나는 주로 영화를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영화 촬영 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한국의 선진적 사례를 소개했다.한국에서는 2018년 서지현 검사가 자신에 대해 성추행을 했던 검찰 간부를 고발한 후…
당신 만의 캐비닛을 만들어 뒀나요?
플랫폼 노동의 경험을 담아 2020년 11월 르포르타주를 한 편(뭐든 다 배달합니다) 펴냈다. 사회 현상을 담은 책을 내다보니 몇몇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십 수 년 인터뷰어(interviewer)로만 살아오다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어 보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사전에 질문지를 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열 가지를 이야기해도 기자는 한 가지 주제를 뽑아내 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난 두서없이 신나게 떠들었다. 너무 중구난방으로 이야기해 인터뷰를 끝내고 나올 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업(業)의 재정의
지난 8년간 워싱턴 포스트(WP)의 격변기를 이끈 마틴 배런(Martin Baron) 편집국장이 보름 전 퇴임했다. 2013년 말 그의 취임 당시 WP는 지역 신문을 고수하고 있었다. 로컬 수익 모델을 가진 글로벌 신문이라는 기묘한 정체성은 그 후 반년 만에 깨졌다. 제프 베조스가 WP 인수 직후 글로벌 뉴스 기업을 표방했기 때문이다.업(業)의 재정의는 어느 기업에나 중요하지만 언론계에서 제기되는 일은 드물었다. 신규 진입자가 거의 없는 과점 체제에서는 별 쓸모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팩트 기반의 보도 불편부당 같은 직업 윤리가 모
포털, 뉴스에서 손을 떼라
최근 MBC 스트레이트는 포털 네이버와 다음 뉴스가 보수매체에 편향되어 있고 진보매체 배제 성향을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네이버 모바일 마이뉴스 추천에서는 보수언론 48%, 통신사 24%, 방송-중도언론 24%, 진보언론 3.6% 비중으로 기사를 보여준 것으로 나타났다. 포털이 보수편향일까? 포털 뉴스의 장점을 살펴보자. 다양한 언론 기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진보, 보수, 중도의 관점을 두루 접할 수 있고 다른 성별/세대가 어떤 뉴스에 관심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시사, 연예, 스포츠 등 모든 종류의 기사를 볼 수 있다.…
백신 접종, 등수 매길 일인가
먹고 사느라 시사평론가 직함으로 이런저런 방송 출연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분장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어느 날은 분장사들이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질문을 하는 거였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우리나라만 맞는 거죠?, 부작용이 상당하다는데 괜찮을까요?당신네 방송에 연일 의사들이 나와 백신은 안전하다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려다(아마도 분장사들은 비정규직일 것이다) 말았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는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이미 해외에서 수천만명이 맞았고 접종을 미룰만큼의 부작용은 확인된 바 없다, 오히려 특정…
기후위기 극복이라는 시대정신
학부 마지막 학기가 끝났던 2019년까지 필자는 기후변화에 관심 많은 언론사 지망생이었다. 본격적인 수험생 생활 시작을 앞두고 언시생들이 한 번쯤 찾는다는 한터(한겨레 배움터)에서 기초 강의도 듣고, 신문 스터디도 시작하며 마지막 학기를 보냈다.수험 생활을 포기하기까지 거창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해 9월21일 대학로 앞에서 기후위기 비상행동의 집회가 개최됐다. 기후정상회담을 앞두고 전세계적으로 400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던 대규모 시민 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날 국내 기후관련 집회 중엔 처음으로 5000명이…
투명성,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1월28일 SBS 끝까지 판다 팀의 월성 원전 관련 단독보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내용 못지않게 취재과정에서 검증한 자료를 공개한 방식이었다. 취재진은 검찰의 산업통상자원부 직원 3명에 대한 공소 사실과 이들이 삭제한 파일 530개 목록을 누구나 접근해서 확인할 수 있도록 SBS 뉴스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취재 기자는 앵커와의 대화 말미에 “해당 내용은 검찰이 아닌 적법한 통로로 입수했다는 점을 분명히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최근 몇 년간 특히 검찰 관련 보도를 둘러싸고 취재경위에 대해 뉴스 이용자들이…
한국 언론이 말하는 일본 '우익'이란?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를 그만둔 지 4년이 됐지만, 지금도 프리랜서로 아사히신문GLOBE+라는 온라인판에 한국 문화 관련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그 외에도 아사히신문GLOBE+에서 동아일보 기사 번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우익’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우익은 일본어로 그대로 右翼(우요쿠)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뭔가 뉘앙스가 다른 듯하다.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의 이임 인사차 면담을 거부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일본 측 외교 소식통이 “스가가 우익의 비난을 받을 수 있어서 면
내가 사장이 된다면…
두어 달 전, 한국언론진흥재단으로부터 패널 조사 설문지를 받았다. 질문 중에 ‘사장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내용이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지라, 즉흥적으로 적었다. “기자 수를 늘리겠다. 기자들에게 실무 역량 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겠다. 기자라면, 스스로 기획하고, 취재하고, 기사 쓰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기사를 데스크가 매번 오랫동안 고쳐야 한다면, 그는 독립된 기자가 아니다. 기사를 그대로 실을 정도로 모든 기자들의 실무적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그 기본 위에 정파성을 쌓든, 의견을 펼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