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음절 하나하나 연필로 꾹꾹 눌러 쓰듯 말했다. 확신으로 가득 찼지만 낙관하지 않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말투였다. 올해로 입사 18년, 항상 대열의 맨 앞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팔뚝을 치켜세웠다. 누구보다 분노했고, 누구보다 아쉬워 한 시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측은 정직·감봉 등 세 번의 징계를 내렸다. 그렇게 앞장서다보니 그는 어느새 동료들 가운데에 서게 됐다. 지난 4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새노조) 4대 정·부위원장 선거에서 97.6%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선출된 성재호 위원장 당선자에 대한 얘기다.
당선의 기쁨도 잠시, 그가 마주한 KBS의 상황은 폭풍전야다. ‘청와대 낙점설’이 불거진 고대영 사장의 임명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사태들은 KBS 노사 간 ‘강 대 강’의 구도를 예고하고 있다. 7일 KBS연구동 새노조 대회의실에서 만난 성 당선자는 “걱정하고 불안해 보인다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MB정권부터)지난 8년간 어렵지 않았던 시절은 없었다”며 “‘맞불’을 놓겠다. 필요하다면 피하지 않겠지만, 무모한 충돌이나 전면전이 아니라 먼저 고민하고 생각하는 영리한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끝으로 치닫는 현 정권의 마지막 기간을 맡게 됐다고 보고 희망을 갖고 싸우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싸움을 위해 내세운 무기는 연대와 협력이다. 막연하게 들릴 수 있지만 성 당선자의 구상은 구체적이다. 그는 KBS 내 직종·직급·노조 간 갈등과 차이로 구성원들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문제가 국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고 봤다. 그는 “조합 간 의견조율 문제를 해결하고 시민사회, 시청자와 연대를 강화할 생각”이라며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고 제대로 된 견제를 할 수 있도록 법·노동·언론·경제·학계 인사들이 참여한 범국민적인 감시기구를 시도하려 한다. KBS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달라는 바람”이라고 호소했다. 이는 KBS이사회와 시청자위원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나온 방편이기도 하다.
그는 나아가 KBS 내부의 소식을 국민들과 직접 공유하기 위한 콘텐츠와 이에 대한 형식·내용에 대한 고민도 밝혔다. 기존 노보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소통을 국민 전반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텍스트, 영상 뉴미디어를 가리지 않고 고민해 조합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큰 싸움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욕설을 섞어 보도공정성을 요구하던 글을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가 지난달 해임된 경영직군 신 모 조합원에 대한 지원은 KBS 내·외를 아우르는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작은 출발이기도 하다. 성 당선자는 “방송 관련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진 신 선배를 고문이나 위원 위촉을 해서 조합 활동을 함께 할 생각”이라며 “선거과정에서 매달 일시적인 후원금 모집을 했고 조합원, 비조합원 모두 적극 참여했다. 경제적인 부분을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