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축구경기를 보는 것도, 직접 축구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한 학년에 두 반 밖에 없는 충남 서산의 작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다른 학교와 정기전 비슷한 축구경기를 만들어 공을 차곤 했다. 그 열정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도 이어졌다. 붉은악마 충남 서북부 지회장을 맡아 응원을 이끌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바로 김형준 한국일보 기자의 얘기다.
그러나 그에겐 항상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또 애매한 판정에 졌다”며 심판 탓을 하는 해설진들이었다. ‘애매한 판정’이란 단어로 패배의 원인을 심판에게 돌릴 때면 그는 ‘승복’이라는 스포츠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2006년 독일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스위스전은 그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애매한 골 판정 상황에서 지상파 방송 3사 해설진 모두 명쾌한 분석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심했다. 직접 심판이 되기로. 때마침 열린 2006 하계 신인심판 강습회에서 필기시험과 체력테스트를 통과했고, 그렇게 대한축구협회 3급 심판자격을 갖게 됐다. “심판 양성 과정을 거치니까 모든 상황에 ‘정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결국 어떠한 순간에도 ‘애매한 판정’이란 있을 수 없었던 거죠.”
그러나 그런 심판에의 열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무디고 무뎌졌다. 기자가 되면서 연이은 술자리에 체력은 망가져갔고 그러다보니 매년 치러야 할 체력테스트에 참가하지 못해 심판 자격이 정지됐기 때문이다. 심판 자격이 말소되는 걸 막고자 작년 늦가을에 치른 리텐션 코스에서는 자만심 탓에 체력테스트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그제서야 김 기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2015년 리텐션 코스를 목표로 꾸준히 운동하며 체력을 길렀다. 그 덕분에 지난 5월에는 무난하게 체력테스트를 통과해 심판 자격을 회복했다.
그의 소식은 회사에도 퍼졌다. 곧 그에게 심판과 관련한 글을 쓰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고민했다. “심판이 말이 많아지면 여러모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반드시 필요하지만 존재감이 없을 때 가장 빛나는 자리가 심판이기 때문이죠.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한 번쯤 다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기사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심판을 좀 더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연재를 결정한 계기 중 하나였다. “심판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아요. 체력, 순간적인 판단력, 인성 등이 종합적으로 요구되고 돌발 상황이 수시로 발생하는 터라 경기장에서는 시종일관 긴장해야 하죠. 그런데 선수나 감독이 심판에게 욕설을 날릴 때면 정신적인 충격과 함께 박탈감까지 느껴지더라고요. 심판이 잘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존중하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심판이 되다’ 시리즈는 그렇게 지난 8월25일 첫 연재를 시작했다. 김 기자는 “매주 화요일 심판 도전기를 비롯해 심판 체험 위주의 얘기들을 쓰고 있다”며 “앞으로는 여자심판이나 심판들의 제2의 직업 등 큰 틀에서 심판계를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언제까지 심판 활동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오래 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답했다. “좀 더 많은 경기를 보고 싶긴 하지만 진짜로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거든요. 욕심을 낸다면 2급 심판으로 승급할 때까지만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