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꺾지 않았던 사관, 우리들 기자와 같죠"
'흔적의 역사' 연재하는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강진아 기자 saintsei@journalist.or.kr | 입력
2013.10.02 14:25:01
“과거 역사를 서술하며 미래에 희망을 걸어본다(述往事 思來者).”
사마천은 거세를 당한 후 ‘사기’에 매달렸다. 치욕에 자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대신 ‘사기’라는 역사서를 기술하며 미래를 대비했다.
지난 2년간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연재한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교감”이라고 말했다. 과거는 지나간 일에 그치지 않으며 현재와 미래를 투영하기 때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낸 흔적의 역사는 지난 2011년 8월에 시작해 이달 중 100회를 맞는다. 이 기자는 “흔치 않은 기회”인 만큼 “행복한 2년2개월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경향신문 커뮤니티 파워블로거이기도 한 그는 한정된 지면에 모두 담지 못한 이야기는 블로그에 실어 독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켰다.
흔적의 역사가 오랜 기간 사랑받으며 장수한 비결이 있다.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이야기꾼인 이 기자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들려준다. 흔히들 역사를 “어렵다” “재미없다” 말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과거 역사가들은 오히려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생생한 필치”로 기록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 고조 때 말더듬이였던 주창이라는 인물의 말더듬까지 세밀하게 표현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 시절 사간원 정언(사무관격)이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며 노(老) 재상에게 “살코기를 씹어 먹겠다”고 한 막말까지도 실감나게 적혀 있다. 이 기자도 늘 생생한 글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가 꼽는 역사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텔링’이다. “역사라는 사실에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즐겁다”는 이 기자는 기사에 현실을 녹여냈다. 조선시대 국가차원의 노처녀와 노총각 구제대책에서 현재의 ‘솔로대첩’을 연상했고, 4500년 전 요순시대부터 시작한 혼수의 뿌리 깊은 유래 등에서 오늘날의 호화 혼수 문제를 꼬집었다.
문화재 담당 기자인 그가 ‘문화유산’과 ‘역사’를 전문으로 하게 된 것은 10년차가 넘는 중견기자 때였다. 때문에 일회성 기사보다 장기간 심층 기획으로 접근했다. 지난 2003년 유적 발굴 현장에서 조그만 단서로 역사의 미스터리를 파헤쳤던 ‘한국사 미스터리’가 첫 출발선이다. 2007년엔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으로 비무장 지대에서 전쟁의 역사와 흔적을 찾아 유네스코 유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또 같은해 러시아와 중국 등 동북권 일대를 24일간 대장정한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를 연재하며 “닫혀 있는 한국사를 넘어 열려 있는 역사적 시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올해 27년차인 이 기자는 “기자라는 직업은 ‘놈 자(者)’를 쓰는 유일한 직업”이라며 “그만큼 낮은 위치에서 서민의 언어로, 서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왕의 명령에도 결코 ‘사필(史筆)’을 꺾지 않았던 사관들처럼, 기자도 이들과 같다는 것이다. 영조가 신하들과 밀담을 나눈 후 사초를 불태우자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관의 붓끝은 자를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고 항변한 사관, 사관을 유독 싫어했던 태종이 편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다(臣如不直 上有皇天)”고 질타한 사관의 사례를 들었다.
“종이신문은 옛 사초(史草)처럼 후세에 남는 1차적 사료예요. 인터넷 발달 등으로 시대착오적이라고 하지만, 종이신문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역사적 의미와 존재 이유가 있죠.”
최근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를 공부한다는 이 기자는 역사가 재미없다는 학생들의 입장이 십분 이해된단다. 이제 평생의 업으로 고고학을 삼은 만큼 “역사의 대중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좋겠다”며 “중고등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를 전하는 기획을 꾸준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