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기자, 국회의원 그리고 방통위원장

이경재 위원장은 누구인가


   
 
  ▲ 지난 3월25일 방송통신위원장에 내정된 직후 취재진을 만나 질문에 답하는 중인 이경재 위원장. (뉴시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4선 의원을 지낸 이경재 위원장은 사법부를 제외한 ‘권력의 4부’를 두루 섭렵했다.

가장 애정이 가는 쪽을 물으니 기자 시절을 회고했다. 그는 “지금 언론탄압 이야기가 나오지만 예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받았다”며 “격세지감으로 언론자유가 많이 신장됐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그때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단식 투쟁을 1단으로 ‘모 재야 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식으로 기사를 써야 했다”고 척박했던 군사정권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보람도 있다고 했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신민당 돌풍이 일어났을 때 신동아에 민주화 운동 과정과 투쟁에 대해 이틀 동안 300매를 썼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6·29선언까지 가는 과정에 일조했다는데 대해 언론인 출신으로서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 위원장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한 해직 기자 출신임을 늘 강조한다. 해직을 당해봤기 때문에 해직언론인의 아픔을 잘 안다고 말한다. 그 역시 4년을 해직 상태로 있으면서 고통을 겪었다. 특히 생계 문제가 컸다. “퇴직금을 절반도 못 받고 나왔는데 막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여서 특히 힘들었다. 해직되면 어려운 일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어나는데, 그래서 해직자들은 고통의 악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해직 후 2년을 무직상태로 견딘 그는 작은 회사를 거쳐 당시 한국방송광고공사에 들어가 1년 8개월 정도를 일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방송, 언론, 광고 분야에서 방통위원장의 자질을 훈련 받은 결과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1984년 복직했지만 동아일보에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동아를 거쳤다. 당시 10월 유신에 대해 연재한 기사를 엮어 1986년 ‘유신 쿠데타’란 책으로 펴냈다. 하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군사정권 치하였다. 그의 책은 바로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는 “그때 동아일보가 김지하 시인의 ‘오적’과 함께 묶어 판매금지 사실을 사회면 중간 톱으로 보도했다”면서 “김지하 시인에 비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정치부장을 지낸 그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총재의 공보특보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이후 공보처 차관을 지내며 케이블TV 시대 개막을 이끌었고, 1996년 신한국당 후보로 인천 강화에서 당선돼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16대 총선 때는 민주당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지만 2002년 8·8 재보선에서 당선됐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기도 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 부위원장 겸 미디어홍보위원장을 지냈다.

이 위원장의 딸도 그만큼 유명인사다. 90년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록그룹 ‘삐삐밴드’ 보컬 이윤정씨다. 이 씨는 2010년 결혼한 뒤 남편과 그룹 ‘EE’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자녀들이 하는 일을 특별히 지원해준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공직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손해를 많이 봤다. 방송에도 거의 출연 못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만 활동했다. 어렵게 살고 있다”며 아버지로서 안타까운 마음도 드러냈다.

해직자의 고통은 공감하지만 해결은 ‘자율성’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강변했던 그는 자녀 교육관에 있어서도 “초지일관”이었다. “우리 집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산다. 우리 가정도, 방송도 자율성과 개방성의 원칙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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