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정치공작 문건
제273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1 / 한겨레 정환봉 기자
한겨레 정환봉 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7.03 14: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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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정환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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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상반기, 인터넷과 지면에 쓴 기사를 대충 꼽아봤다. 국정원 기사만 100건이 훌쩍 넘었다. ‘국정원 없이 올 상반기에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황당한 사실을 보고 놀라는 건 기사를 본 독자나 취재한 기자나 똑같다.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반값등록금 영향력 차단’ 문건을 취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확인 취재를 위해 만난 한 서울시 관계자는 “경찰 정보분석보고서도 보고, 검찰 정보분석 보고서도 봤지만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아주 모범적인 보고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바꿔 말하면 국정원은 우수한 정보 자원을 불법적인 정치개입과 공작에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이같은 비상식적인 낭비가 원세훈 전 원장 시절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의 행동을 보면 이런 믿음이 흔들린다.
남재준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정치의 중심에 우뚝 섰다. 국정원이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고 난 뒤부터다. 남 원장은 대화록을 공개한 뒤 참석한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의 명예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6개월간 쉴틈없이 썼던 기사들이 정작 국정원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미쳤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군대 시절 정보장교로 일한 경험이 있다. 이른바 ‘정보쟁이’로 지내면서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정보’로 무언가를 바꾸려는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판단은 그 정보를 보고받은 지휘관의 몫이다. ‘정보쟁이’가 전쟁을 막겠다고 핵탄두가 들었는데 위성을 쏠 거라고 판단하거나, 전쟁을 하겠다고 위성이 탑재됐는데 북한이 핵탄두를 쏠 거라고 주장하면 나라가 망한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정보쟁이’인 남 원장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정보를 사용했다. 여당을 돕기 위해서건 국정원을 구하기 위해서건 중요하지 않다. 정보를 이용해 국내 정치에 개입한 원 전 원장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아직 이정도 수준의 정보기관 밖에 가지지 못했다. 과분한 수상에 들뜨고 기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