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역사는 언론인들의 정신적 지주"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출간한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강진아 기자 saintsei@journalist.or.kr | 입력
2013.05.01 14: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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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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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동포를 구하라.”
37살의 영국인 배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짧은 생을 마치며 이 한마디를 남겼다. 마지막 유언을 통해 그가 왜 한국에서 신문을, 구한말 항일언론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제 치하라는 엄혹한 시절에 ‘신문’이야말로 한국을 구할 수 있다는 유일한 매체라는 외침이다.
한국 언론역사 연구의 대표 학자로 꼽히는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출간했다. 지난 1987년 발간한 동일 제목의 책을 재구성한 증보판이다. 지난달 9일 서재필기념회에서 올해 민족 언론인으로 배설을 선정한 데 맞춰 발행했다.
1904년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한일합방까지 항일언론으로서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일부에서는 외국인인 배설이 민족 언론인이라는데 의구심을 갖기도 하지만 정 교수는 “어리석은 물음”이라고 일축했다. 영국인인 배설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고 덕분에 그가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검열을 피해 항일 투쟁을 지원하고 일본에 날카로운 논조를 보일 수 있었다. 박은식, 신채호, 양기탁 등 우국언론인이 일본에 항거하는 글을 게재하는 총 집결체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정 교수는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항일 논조를 보인 곳이 대한매일신보다. 일제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언론의 전통이 수립될 수 있었던 주춧돌”이라며 “언론인들이 깊이 아로새겨야 할 중요한 신문”이라고 평가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언론 역사의 한 부분만이 아닌 민족의 항일 운동과도 밀접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다. 1905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리자마자 일본의 검열로 장지연은 구속됐고 신문 발행이 중단됐다. 대한매일신보는 영문판으로 호외를 발행해 이러한 과정을 낱낱이 보도했고 국제여론에 호소했다. 정 교수는 “언론사에서 국한문판, 영문, 한글로 3개 신문이 동시에 발행된 것은 대한매일신보가 처음”이라며 “배설은 항일 활동으로 국제사법재판까지 받았고 일본과 영국의 국제적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됐다”고 말했다.
정작 언론인들은 이러한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정 교수는 “언론인으로서 시대상황을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며 “언론인들에게 언론의 역사는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언론 역사를 왜곡하거나 편향적인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 교수는 한 평생을 언론 역사 연구라는 한 길을 걸어왔다. 그가 언론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시절 협회보 제작에서 출발한다. 1966~1977년까지 협회에서 근무한 그는 1971년 한말과 일제시대 언론 등을 조명한 ‘직필춘추’와 ‘신문유사’ 등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탐구에 뛰어들었다. 대한매일신보와의 인연도 국한문판 영인 작업을 했던 1976년부터 40여년에 가깝다.
이후 지금까지 ‘한국현대언론사론’, ‘한국언론사’,‘언론유사’,‘언론조선총독부’,‘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등의 저서를 꾸준히 출간해왔다. 대한매일신보 색인본과 한성순보, 독립신문 영인본 등 언론관련 자료도 다수 만들어 사료 제작에 힘써왔다. 정 교수는 향후 일생에 걸쳐 언론통사를 총정리하겠다는 목표가 있다. 그는 “근현대사 연구에 신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시대를 알고 살펴보면 역사적 흐름 속에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