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 말씀
제271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 / 한겨레 정환봉 기자
한겨레 정환봉 기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05.01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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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정환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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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1일, 국정원 직원의 대선 여론 조작 의혹이 불거진 뒤 5개월 가까이 흘렀다. 5개월에 가까운 취재기간 동안 항상 앞에는 ‘국정원’이라는 두꺼운 벽이 서 있었다. 취재를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그 벽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다. 마냥 두드릴 뿐이었다. 두드리다보니 벽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처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봤을 때에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여당과 정부 정책을 꼼꼼하게 챙긴 것에 한 번 놀라고, 전교조·민주노총은 물론 국민의 선택에 따라 국회에 진출한 야당 국회의원마저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무엇보다 이같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지시말씀이 원 전 원장 재임 4년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시말씀’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사실 확인의 속도는 생각보다 더 느렸다.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의 입은 무거웠다. 한 직원은 “직장 오래 다니고 싶다”며 전화를 끊었다. 또 다른 직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100개의 쓸모없는 말 중에서 한 단어씩 길어 올려 모았다. 외곽 취재도 빠뜨릴 수 없었다. 지시말씀에 나온 내용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광범위한 대상을 상대로 취재를 진행했다. 천개의 퍼즐을 한 개씩 맞추는 기분이었다. 이처럼 검증에 나선 많은 기자들의 노력으로 ‘지시말씀’은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긴 시간을 들여 지시말씀을 보도하기까지 수많은 취재원들에게 빚을 졌다. 이 기회를 빌려 취재를 도운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지시말씀’ 보도 이후 원 전 원장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에 각종 고소·고발을 당했다.
최근에는 서울중앙지검에서 소환조사까지 받았다. 한 개인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그리고 원 전 원장이 겪는 고초에 ‘지시말씀’ 보도가 작은 몫이나마 했으니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피를 먹고 자라온’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고초나 개인의 불편한 마음보다 훨씬 무거운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대선 기간 정치에 개입한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법적 판단은 기다려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많은 국민들은 국정원이 부적절한 활동을 해왔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을 벌인 책임자들에게 죄와 벌의 몫이 공평하게 나뉘어져야 한다. 경찰은 안타깝게도 정의와 불의의 몫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 수사와 달리, 검찰 수사에서는 모든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지길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