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 논문조작
제262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 / 서울신문 박건형 기자
서울신문 박건형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8.16 19: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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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신문 박건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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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모 지방 국립대 교수가 논문을 중복 투고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당시 유행하던 조류인플루엔자 백신을 개발했다며 언론보도와 함께 유명세를 떨치던 사람이었다. 그 분야 권위자에게 해당 논문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100% 확실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기사가 나간 후 해당 교수가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고, 형사 고발도 했다. 몇 차례 위원회가 열렸고 결국 ‘정정보도’를 내라는 결론이 나왔다. ‘학계에서 관행으로 용인되는 수준’이라는 해명이 받아들여졌다. 문제가 된 논문의 학문적 가치를 전문용어로 늘어놓는 교수 앞에서 나는 마땅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구체적인 학문적 내용에서 교수와 기자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경찰에서 10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한계를 느꼈다. 논문을 검토해줬던 권위자는 전면에 나서기를 꺼렸다. 그 뒤로 논문이나 연구윤리 등은 기억에서 지웠다. 제보도 애써 외면했다. 1년쯤 시간이 지나고, 최초 제보자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교수가 논문을 슬그머니 철회했다고 했다. 추후에 다시 확인한 사실이었지만, 명백한 중복투고였다.
강수경 서울대 교수의 논문 조작 제보를 받고 당시의 악몽이 떠올랐다. 과연 논문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자문을 구한 줄기세포 학계의 권위자들은 “학계가 죽는다”면서 기사를 쓰지 말라고 압박했다. 강 교수와 함께 논문을 썼거나 연구비를 지원해준 교수들이었다. 이 와중에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건으로 유명해진 생물학연구정보센터(브릭)에서 강 교수 사건이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젊은 학자들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조악한 포토샵 장난’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의혹이 제기된 논문만 16건이었다. ‘줄기세포의 차세대 주자’라는 강 교수의 명성과 권위자들의 비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제보가 줄을 이었고, 한동안 다른 취재가 불가능할 정도로 확인작업이 계속됐다. “논문을 밤새 살펴봤는데 음해다”라며 강 교수를 옹호하던 학계 최고 권위자 역시 논문조작 의혹이 제기돼 연구진실성위원회에 회부됐다. “황 전 교수 사건에서 줄기세포 학계를 살린 것은 나”라며 강조하며, 대통령 앞에서 줄기세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이번 기회에 이전의 논문조작 사건들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아보려던 후속 취재는 서울대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무참히 깨버렸다. 논문조작이라고 외부에 발표하고는 자체적으로 묻어버린 사례, 학과장이 해당 교수에 구두경고를 한 것을 엄중대처라고 포장한 사례 등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고구마 넝쿨을 잡아당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논문 문제를 바라보는 국내 학계의 시각은 자조적이다. ‘예전엔 그랬다’거나 ‘저널에 실리는 논문이 다 그런 식’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는 일반인들이 ‘한국은 어쩔 수 없는 후진국’이라거나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멀었다’고 쉽게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에든 논문이 ‘학문 성취도’의 핵심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문을 직접 쓰고 읽는 학자들이 논문 문제를 ‘그럴 수도 있는 일’‘한국의 일’‘과거의 일’로 치부하는 것은 이를 개선하는 것이 기대 이상으로 어렵다는 반증이다.
논문이나 연구윤리 문제가 없는 나라나 학문분야는 없다.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 감독한다고 해도 윤리는 결국 연구를 하고 논문을 직접 쓰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건을 겪고도 한국 학계에서 논문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신뢰도는 끌어올릴 수 있다. 논문 조작과 표절을 일삼는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서울대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소 잃은 외양간을 고치고 있다. 연구윤리 교육을 강화하고, 연구윤리를 전담하는 부서도 만든다고 한다. 기자들이 논문표절이나 조작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는 한국 학자의 뛰어난 논문을 소개하고 의의를 설명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