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실 불법 사찰 관련 연속 보도

[제259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 / KBS 송명훈 기자


   
 
  ▲ KBS 송명훈 기자  
 
CD 1장을 들고 대법원 민원실을 나왔다. 무슨 주문이라도 외듯, ‘제발’을 되뇌며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차에 올라 타자 마자 노트북을 켰다. CD안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아직 확신 할 수 없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부팅시간, 다시 한번 ‘제발’을 뇌되며 CD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찰문건이 세상에 공개됐다.
3월초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KBS 새 노조)가 파업을 시작하면서 기자들은 리셋 KBS 뉴스팀을 꾸렸다. 총리실 장진수 주무관의 양심고백이 막 터져 나온 뒤라 언론의 관심은 온통 장진수의 입에 쏠려 있었다.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사건이 전개됐다. 총리실이 권한을 남용해 민간인을 뒷조사한 불법 사찰과 검찰 수사를 앞두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파괴해 증거를 인멸한 사건으로 나뉜다.

장 주무관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2008년 검찰 수사에 대비해 어떻게 증거를 없앴는지를 상세히 밝히고, 그 지시를 청와대로부터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는 ‘윗선은 없다’던 검찰 수사결과를 뒤집은 것이었다.

장 씨의 등장으로 잊혀졌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은 다시 뜨거운 의제로 떠올랐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정작 불법 사찰의 규모와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과연 검찰이 발표한 대로 민간인 사찰 피해자는 전 KB한마음 대표인 김종익씨 한 사람 뿐이었을까. 취재진은 너무도 당연한 이 의문을 붙들고, 증거 인멸과 함께 사라져버린 불법 사찰 그 자체를 주목했다.

총리실은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 증거를 없앴다. 다급했고 숨겨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어딘가에 사찰의 실체를 밝혀줄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원점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진수씨 외에 다른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입을 다문 상태에서 총리실 사찰팀의 행적을 취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실마리는 판결문에 있었다. 판결문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다가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라는 문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문건을 검찰이 법원에 증거로 냈다면 이를 통해 불법 사찰의 전모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됐다. 그 즉시 증거기록과 공판기록을 구했다.

기대했던 대로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는 증거기록에도 문서로 첨부돼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검찰이 내용을 가리고 법원에 제출해 구체적인 사찰 내역을 확인할 수 없었다. 제목만 남아있는 빈껍데기의 문건이었다.

취재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의혹은 더 커졌다. 검찰은 왜 수많은 증거기록 가운데 유독 하명사건 처리부만 내용을 가리고 법원에 제출했을까. 당연히 세상에 알리기 곤란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15000 페이지에 이르는 증거기록과 공판기록을 한장 한장 넘겨 가며 분석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검찰이 법원에 증거기록을 제출하면서 ‘2008년 하명사건 처리부’등의 문서 파일이 담긴 CD도 함께 제출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기대는 반반이었다. 이 CD에도 빈껍데기 뿐인 문서만 담겨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대법원에 증거 열람복사 신청을 해 직접 CD를 확인 해야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먼저 온전한 형태의 ‘하명사건 처리부’가 있었다. 의심했던 대로 여기에는 김종익씨 이외에 다른 민간인과 공기업 임원들에 대한 사찰 내역이 기록돼 있었다. 하명의 주체는 청와대(Blue House)를 뜻하는 ‘BH’로 표기돼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KBS와 YNT 등 언론기관에 대한 사찰문건 등을 포함해 불법 사찰로 의심되는 문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총리실 사찰팀은 이미 검찰 수사에 앞서 컴퓨터 10대의 내용을 모두 삭제했고, 종이문서 4만5천장을 파쇄해 버렸다. 그런데 운이 없게도 한 수사관이 USB 메모리를 검찰에 압수당했고, 그 안에서 일부 사찰 문건이 드러난 것이다.

국민을 보호해야할 국가가 초법적인 권한으로 국민을 감시했다. 이것이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이다. 그리고 검찰은 이미 드러난 것만 문제 삼고 사건을 마무리 했다. 진실은 은폐됐다. 이것이 검찰의 부실 수사다. 그리고 기자들은 시키는 일만 하기에 바빴다. 이것은 언론인의 직무유기다.

KBS 새 노조가 파업을 하고 있다. 이미 최장기 파업 기록을 갈아 치웠다. 그동안의 직무유기를 고백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규 방송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하고 있다. 제대로된 카메라도 없고 편집기도 없지만 진실의 힘을 무기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KBS 새 노조의 뉴스 타이틀은 ‘리셋 KBS’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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