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현상’ 새 시대에 대한 갈망…새로운 세대가 주인 돼야정연주 전 KBS 사장이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라는 부제를 붙인 책 ‘정연주의 기록’을 펴냈다. 유년 시절부터 KBS 사장 때에 이르기까지 그의 60년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를 만난 날은 전태일 열사의 모친인 이소선 여사가 별세한 며칠 뒤였다. 이야기는 이 여사의 별세 소식으로 시작됐다. -최근 세상을 떠난 이소선 여사와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1980년 5·17 때 ‘국기 문란자’로 수배됐다가 강남경찰서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았죠. 그때 보호실에서 이 여사와 노동자들과 하룻밤을 같이 보냈어요. 70년대 후반 청계 피복노조 근방에서 집회가 종종 있었는데 해직기자로서 자주 참석했죠. 그때 제가 편집장을 맡은 월간 ‘대화’가 폐간된 것도 경찰이 청계천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를 무력 진압하는 모습을 묘사한 글 때문이었어요.
이제 군부독재에 맞섰던 시대의 스승들이 부재한 시대가 됐습니다. 송건호 선생, 문익환 선생, 리영희 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 이돈명 변호사 등…. 제가 30대 때부터 정말 많은 위로를 받은 분들이었어요. 동아투위 세대도 많이 세상을 떠났어요. 17명이 작고했으니까요.
이제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듯해요. ‘안철수 현상’을 지켜보며 느꼈어요. 이 시대에 맞는 새 세대가 나서 주인이 돼야 한다고요. 대중은 새로운 것을 갈망합니다. 낡은 이념, 정치 등 경직된 과거 시대의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무엇이 필요해요. 그건 새 정치세력이거나 패러다임, 가치체제일 수도 있고요. 아직 색깔론이나 앞세우는 한나라당 같은 극우수구 세력은 물론이고 새로운 흐름을 수용할 준비가 부족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민주당도 갑갑하죠.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변호사,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기존 정당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닌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정치는 그래도 이런 현상이라도 나타나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제일 뒤처진 분야가 검찰과 언론이에요. PD수첩, 미네르바, 한명숙 전 총리, 곽노현 교육감 사건을 비롯해 제 지난 3년간 법정투쟁도 그렇고요. 검찰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권력에 봉사하죠. 언론은 그 정치검찰이 던져주는 먹이를 덥석덥석 받아 확대재생산합니다. 진보·보수언론이 똑같아요. 그래서 혁신이 가장 절박한 곳이면서 가장 가능성이 없는 곳이기도 해요. 검찰은 바뀔 기미가 없고 언론은 조·중·동에 방송까지 줬으니 더 심각해요.
-요즘 부인과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을 보낼 듯한데요.평생 편하게 못해줬죠. 우리가 1974년 6월 결혼했는데 넉 달 뒤 동아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회사서 매일 투쟁하고 살다시피 했죠. 이듬해 큰아들이 태어날 땐 회사에서 단식하다가 해직돼 실직자가 됐죠. 투옥과 수배, 도피 생활이 이어졌고 미국에 가서도 많이 고생시켰죠. 한겨레 논설주간 시절도 경제적으로는 좋지 않았어요. KBS 사장 때는 수구세력들이 워낙 나를 미워해서 앙갚음을 크게 당했죠. 사장에서 물러나고 나서는 편하게 살까 싶었는데 재판이 3개나 걸렸어요. 어쨌든 핵심적인 두세 개 재판에서 2심까지 이기고 나니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달리지 않고 평화를 누리고 있어요. 제가 여행을 무척 좋아해요. 둘이 기차여행도 가고 산이나 휴양림도 찾죠.
-책 ‘정연주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기사처럼 객관적으로 쓰려 노력한 면이 보입니다.출판사 요구로 절반은 새로 썼어요. 이 책의 기초가 된 건 2001년에 쓴 ‘서울-워싱턴-평양’으로 절판이 됐어요. 요즘 대학생 상대로 강연을 많이 하는데 젊은이들이 1970~80년대를 너무 몰라요. 젊은 기자들도 그렇죠. 우리 70~80년대 언론사가 어땠는지 젊은 기자들, 기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이 읽었으면 해요. 그리고 기자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한겨레 논설주간 때 한국언론재단 수습기자 위탁교육에서 ‘기자정신’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어요. 원래 리영희 선생께서 하기로 돼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지셔서 내가 맡았죠. ‘언론자유는 정치·자본권력, 족벌사주 등 억압 요인들과 싸워 찾아와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밖에서 주는 언론자유는 없습니다. 민주적 정권, 선한 리더십이 가져다 줄 수 없어요. 나쁜 정권, 나쁜 사장이 오면 또 빼앗아갈 거 아니에요?
저널리스트란 일반 직장인과 다릅니다. 소명의식도 필요하고 우선 프로페셔널리즘이 있어야죠. 전문가로서 직업윤리가 필요해요. 저널리스트로서 윤리는 사실보도, 권력감시죠. 이걸 못하면서 자기 소속 회사나 이념에 동화돼버린다면 저널리스트가 아니죠.
-인생에 세 번 해직됐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항적 기질 탓일까요.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기독교예요. 원래는 보수적인 신앙 체계를 갖고 있었죠. 안병무 선생을 접하면서 그것에서 해방됐어요. 성경에 예수가 사회적 불의에 투사로 싸우는 장면이 많습니다. 예수가 ‘평화를 주러 온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는 구절도 있어요. 예수는 항상 강자에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살면서 갈림길에 서게 될 때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내가 저항정신이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KBS 사장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만두라는 온갖 압력에도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러나면 안된다고 생각했죠. 원칙의 문제였어요.
-동아투위 사태로 해직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해직된 뒤 회유가 많았어요. 다시 들어간 사람도 있었고, 그들이 ‘너도 같이 들어가자’고 간곡하게 말도 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은 없었어요. 1백40명 다 같이 돌아가면 몰라도 선별적으로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 면에선 내가 융통성이 없는지도 몰라요.
-동아일보를 많이 비판하지만 애증이 있는 듯합니다.그렇죠. 언론인의 꿈을 이룬 첫 직장이자 20대 후반을 바친 곳이니까요. 동아에서 좋은 친구, 선배들을 만났고요. 저널리스트로서 기초를 닦았고 당시 최고 신문이었잖아요. 해직된 뒤에도 동아가 양심을 회복하기를 기대했어요. 대량해직은 유신 정권에 굴복하고 야합한 측면이 있었죠. 우리가 기대한 건 부당한 행위였다는 걸 인정하고 원상복귀시키라는 거였어요.
동아도 우리 때와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 때는 최고의 언론이었고 언론으로서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조·중·동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차라리 조선일보는 변신할 때를 알아요. 동아의 찬란했던 역사와 전통을 생각하면 씁쓸해요. 박종철 고문 사건 보도 때는 그래도 아직 살아있구나 여겼지만 요새는 족벌체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어요. 사실 한국일보도 그렇죠. 같은 조간인 조선보다 더 젊고 생기발랄했어요. 족벌 내부 ‘왕자의 난’으로 그 좋던 신문이 후퇴했죠.
-책에 나오는 80년대 수배시절 부모님과 마지막 만남은 감동적입니다. 부모님 묘소는 아직도 미국 휴스턴에 있습니다. 1982년 미국에 가게 된 계기도 형님을 따라 이민가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서였는데 먼저 세상을 떠나셨죠. 2000년 귀국한 후에는 묘소도 못 찾아뵙다가 5년 뒤 KBS 사장 때 미국 출장 중 짬을 내서 갔어요. 그때도 용태영 기자 납치 사건이 터져서 현지로 가려고 수속을 밟는데 다행히 일이 잘 해결돼서 겨우 찾아뵀어요. 그게 마지막이죠. 살아가다가 아주 힘들 때는 부모님이 가끔 꿈에 나타나세요. 80년대 수배생활 때도 그랬죠. 수배가 감옥에 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요. 주변사람들까지도 어찌나 괴롭히는지…. KBS 사장 하면서 힘들 때도 어머니가 나타나시곤 했어요.
-유신 시절 많은 핍박을 받았는데 최근 박근혜 대세론에 심경이 어떤지요.KBS 사장 시절 박근혜 씨가 한나라당 대표를 할 때 수신료 문제로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유신의 딸과 유신에 박해받던 사람이 만났다고도 했죠. 어찌 됐든 나에게 박 전 대표는 ‘박정희의 딸’입니다. 대세론이 나오지만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 대선을 네 번 지켜보니 대세론으로는 정작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워요. 대세론은 때론 독이 되죠.
-직접 만든 ‘조·중·동’이라는 조어는 상당히 대중화됐습니다.칼럼을 쓰면서 세 신문사 머리글자를 한번 압축해봤더니 괜찮더라고요.(웃음) 지금 이런 언론 토양에선 사람 사는 세상이 오기가 힘듭니다. 조·중·동과 경제지는 모두 강자의 편이잖아요. 대부분 언론이 한쪽을 지향합니다. 내 언론인생 40년 동안 이렇게 일방적인 때가 없었어요. 이제 방송까지 줬으니까요. 사회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공론장은 황폐해집니다.
-종편 등장 대응으로 한겨레에 보도채널 추진을 권하기도 했습니다.진보언론의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20~30대가 희망입니다. 젊은 세대는 신문을 안 읽고 방송뉴스도 잘 안 봅니다. 지방 강연을 가면 뉴스를 어떤 수단으로 보느냐고 꼭 물어봅니다. 그럼 대부분 인터넷으로 본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면에서 진보언론의 영향력 확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보 역시 낡은 이념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낡고 경직된 이념 틀을 갖고 진보라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진보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변화하려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좁고 경직되게 해석하면서 특종 경쟁에만 내몰리는 건 진보가 아닙니다. 수구와 다를 바 없죠.
-KBS 사장 재임 시절 고교 후배에게도 아무 혜택을 주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직원들이 사장의 행방을 찾으니 현금 인출을 직접 하러 갔더라는 일화도 있던데요.사장 취임 첫날 한 간부가 급히 보고할 게 있다면서 종이를 내밀었습니다. 제 고교 동문 KBS 직원 명단이었어요. 그 자리서 종이를 찢어버리고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말라고 했죠. 저는 지연·학연을 철저히 배격합니다. 사장 때 유력 정치인을 비롯해 인사청탁을 넣는 경우가 많았지만 수용한 적은 없습니다. 경력기자 선발 때도 전 정권에서 고위 공직자를 지냈던 분이 응시자 한 명을 부탁했어요. 면접위원들에게 ‘이 사람은 정치권에 줄을 댔으니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야 다른 사람이 피해를 안 본다는 생각이었죠. 나중엔 정말 독한 사람이라고들 하더군요.(웃음) 저는 지금도 채용에서 지역대학 출신을 배려하고 블라인드 면접을 도입한 걸 가장 보람된 일로 여깁니다.
생리적으로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그때 시대정신이 탈권위, 자율권 확대였잖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공감이 갔던 게 그런 부분이었습니다. 이번 안철수 현상도 그런 것들의 연속이죠. 그게 계속 이어졌더라면 자리를 잡았을 텐데 지난 4년간 많이 뒤집어졌습니다.
-정 사장을 지지했던 KBS 구성원 중에서도 2006년 연임은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은데, 당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까.고민을 많이 했죠. 훌훌 털고도 싶었어요. 연임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만약 내가 떠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제일 걱정했습니다. 팀제는 곧 없어질 테고 미디어포커스 등 여러 프로그램들이 폐지될 가능성이 높았어요. 당장 욕을 먹더라도 2~3년 더 유지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욕먹는 건 나 개인이지만 이런 걸 지키는 건 대의니까요. 지금 그런 선택의 순간이 다시 와도 그렇게 할 겁니다. 만약 그때 다른 사람이 들어왔으면 더 쉽게 내줬을 수도 있죠. MB 정권 이후도 쉽게 굴복했을 거고요.
-책에서 KBS 사장 시절 노 전 대통령이 전화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는데, 아래 간부들끼리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지 않나요.있어도 강압적인 건 아니었을 겁니다. 노 전 대통령이 KBS에 불만이 많았다고 간접적으로 들었어요. 탐사보도팀의 첫 작품이 참여정부 고위공직자 재산 검증이었습니다. 당시 한 학회가 정권에 가장 비판적인 언론을 꼽았는데 1위가 조선일보, 2위가 KBS로 결과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다녀보면 상반되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KBS가 참여정부 흠집을 얼마나 많이 냈느냐’고 탓합니다. 반대쪽 사람은 ‘정부 두둔만 했다’고 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대통령이 전화 안 한 게 고맙죠.
-재직 시절 출범한 탐사보도팀의 사실상 해체 등 KBS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미국에서 부시가 대통령 된 뒤 ‘애니싱 벗 클린턴’(Anything but Clinton)이란 유행어가 있었어요. 클린턴 때 정책 반대로만 간 거죠. 지금 KBS는 ‘애니싱 벗 정(연주)’입니다. 사실 정책이나 프로그램 중 괜찮은 건 그냥 가도 되잖아요. 이명박 정권이 왜 이렇게 반대로만 가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예를 들어 남북관계에서도 노태우 정권 시절부터 남북이 합의한 게 많습니다. 합의한 거는 지켜야죠. 그런데 다 엎어버립니다.
-‘기록’에 친교 관계를 가진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지금 가장 가까운 벗은 누군가요.고교 친구들은 미국에 간 이후 거의 못 만났어요. 미국 생활하면서도 외로웠고요. 한겨레 주간 시절엔 논설위원실 식구들 중심으로 지냈고, KBS 사장하면서는 사람들 만날 시간이 더 없고 소원해졌죠. 요즘은 KBS 후배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여의도서는 안 만나요. 집 근처로 오라고 하죠.(웃음)
-평생 언론개혁과 남북문제에 천착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그 두 가지가 제 영원한 테마죠. 지금 일의 핵심은 지방강연과 글쓰기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글을 통해 언론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토양에 언론이 차지하는 부분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죠. 이념의 무기가 돼 사회를 분열시키고 다양성을 없애는 언론을 빨리 극복해야죠.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사진 원성윤 기자 socool@journalist.or.kr
<주요 이력>
1946년 경북 월성 출생
1970년 동아일보 입사
19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1982년 미국 휴스턴대학 유학
1989년 경제학 박사 학위
한겨레신문 워싱턴특파원 발령
2000년 귀국, 한겨레 논설주간
2003년 한겨레 퇴사, KBS 사장 취임
2008년 KBS 사장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