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제244회 이달의 기자상 지역기획보도 신문부문 / 제민일보 장공남 기자


   
 
  ▲ 제민일보 장공남 기자  
 
고교시절에 올랐던 한라산 정상을 20여 년 만에 다시 올랐던 것은 지난 2010년 11월이었다. 조선조 제주에 온 유배인들이 한라산 정상에 남긴 흔적을 확인하기 위한 등반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추방해 일생토록 귀환하지 못하도록 하는 형벌이 유배형이다. 제주에 온 유배인들은 어떤 사람이었고 제주에서 무엇을 남겼을까? 제주 주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같은 물음에서 취재는 시작됐다.

일부 유배인은 자손을 낳고 제주입도조가 됐다. 제주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들의 자손은 제주사람이 되어 제주의 성씨를 다채롭게 했다. 제주출신 또는 제주사람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제주에 거주하는 유배인 후손의 수는 적지 않다. 제주출신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현재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제주사람이 될 수 있다. 역사는 이것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취재에 앞서 준비를 탄탄히 했다. 제주에 온 2백여 명의 유배인 중 주제별로 30여 명을 추렸다. 이 과정에서 제주대 양진건 교수에게 조언을 구했다. 양진건 교수는 2대에 걸쳐 제주유배를 연구하고 있다.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 두번이나 인터뷰에 응해 줬다.

기획기사는 2010년 6월2일자 제민일보 20주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12월29일자까지 이어지며 모두 16차례 독자와 만났다.

선풍기를 가까이 하며 여름더위를 견뎌내자 가스히터를 틀어야 하는 겨울이 됐다. 현장 취재와 자료 취재를 겸했다. 주중에는 출입처 기사를 쓰고 토요일이면 어린 딸과 함께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싫다 않고 따라 다녀준 딸이 대견스럽다.

2000년 S사의 디카를 시작으로 다섯 번이나 기종을 변경했다. 이 같은 디카에 욕망을 역사현장 촬영에까지 이어가려 했지만 장비나 결과물에서 전문 사진기자에 비해 역부족이었다는 점은 시인해야겠다.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 7개월 내내 술과 같이 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기사를 쓰는 날만은 예외였다.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긴 밤을 견뎌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연재가 진행되자 가장 먼저 기사를 알아 본 사람은 제민일보 진성범 사장이었다. 현대적 감각으로 기사를 썼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제주도교육청, 추자중학교, 목포대 김경옥 교수도 도움을 줬다. 한라산 등반은 김영학씨가 동행했다.

유배인은 일기나 시를 남겼다. 기록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과거사의 교훈 중 하나는 기록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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