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기획-영구빈곤 보고서
제236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신문부문/한겨레21 안수찬 기자
한겨레21 안수찬 기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0.06.16 14: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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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21 안수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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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 없는 취재가 있다면 누구건 기자노릇을 자처했을 것이다. ‘시민기자’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취재 과정의 고충을 매순간 감내하는 ‘직업기자’의 자리는 여전히 굳건하다. 시민은 분노와 각성의 기운을 빌어 한 순간 기자가 되어볼 수 있지만, 프로페셔널 한 기자는 일상과 인생을 통틀어 간난신고를 감수한다.
그런 이치를 모르지 않지만, 인내 없이 진짜 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참말이지 빈곤 취재는 환장하도록 힘들다. ‘탐사기획-영구빈곤 보고서’는 약 8주에 걸친 취재의 결실이다. 3주 동안 교수·사회복지사·시민운동가 등 여러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서적과 논문을 검토하면서 사전취재를 했다. 5주 동안 영구임대아파트 2개동 3백60가구를 일일이 방문해 현장 취재를 했다. 기사 집필과 보충취재에 보낸 3주까지 더하면, 석 달 동안 이 작업에 매달렸다.
가난한 사람들은 집에 없거나, 있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문을 열어놓고서는 기자를 돌려보냈다. 그들을 만나 심층면접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했다. 오전·오후·저녁으로 시간을 나눠 찾았고, 평일은 물론 주말까지 할애했다. 독거·맞벌이·장애인 등 빈곤 가구의 특성상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만나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 노동에 지쳐 일찍 잠든 가족도 있었고, 장애인이나 병자가 있다며 방문 취재를 사양한 가족도 있었다. 그러나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1백21가구를 설득해 1시간 이상씩 면접 조사했다. 이 가운데 20가구는 다시 추가 방문하여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임지선 기자는 나보다 ‘후배’라는 이유로 특별히 더 많이 인내해야 했다.
힘들었던 것은 몸보다 마음이다. 무기력은 전염된다. 눈높이를 맞춰 대화를 시작하면, 그들의 끝없는 인생 곡절이 오감을 강하게 자극하다 못해 끝내 무디게 하였다. 어쩔 수 없고, 방도가 없고, 그저 운명인 일들이 그들에겐 참 많았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 일찍 죽음을 맞이한 경우가 많았는데, 죽음조차 그들의 무기력을 뒤엎어놓진 않았다. 아무 감정 없이 가족의 죽음을 돌아보던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기사를 보고 “불편하다, 외면하고 싶다”는 독자의 반응도 있었는데, 실은 기자들부터 그러고 싶었다.
그럼에도 발품을 팔아 무기력의 감염을 인내한 이유가 있다. 빈곤 문제를 보도하는 한국 언론의 전형적 패턴을 극복하고 싶었다. 달동네·쪽방촌 등 전통적 빈곤 거주 지역에 주목하거나 노숙자·독거노인 등 절대 빈곤을 겪고 있는 이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한국 언론은 빈곤을 보도한다. 이런 시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빈곤 문제를 대하는 한국 언론의 관성이 깃들어 있다. 한국의 빈곤층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곳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일종의 편견 말이다.
1990년에 들어선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도심 중산층의 거주 지역에 끼어 있다. 노태우 정부가 마련했다. 뒤이어 들어선 정부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주거 대책을 내놓았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정책 논쟁에서조차 제외됐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난 20년간 한국 도시 빈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잊혀진 존재’로 살아 왔다. 난곡·가리봉동 등 기왕의 빈민촌이 철거되는 동안에도 서울 도심에서 집단 거주의 공간을 지키며 가난하게 살아왔다.
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에 대한 예외적 관심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듯한 상대적 빈곤층의 실상을 그들에게서 발견했다. 언젠가는 잘 살게 될 것이라 믿었던 ‘희망의 절대 빈곤’ 시대가 저물고, 끼니를 해결하긴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절망의 상대 빈곤’ 시대가 도래했음을 생생한 현장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 언론은 ‘주장하는 조직’이 아니라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 보지 않으려는 것 가운데 하나가 빈곤이다. 그걸 드러내어 보여주는 일에 좀 더 인내심을 가지려 한다. 그게 진짜 기자가 되는 길이라 믿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