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서 죽이고 빼서 죽인다


   
 
   
 
‘써서 죽이고 빼서 죽인다.’ 기자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실제 이 말은 농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점이 그동안 언론을 제4부로 만드는 힘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힘이 부메랑이 되어 기성언론의 목을 조이고 있다.

현재 촛불시위정국에서 네티즌들이 광고주를 압박하고, 소위 보수언론에 대한 절독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수언론들의 반응도 자못 격앙되어 있다. 하지만 언론사도 이렇게 화를 내기에 앞서 이런 현상이 만들어진 이유를 먼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보수신문의 주장을 다수의 의견으로 생각하고 믿어왔다. 보수신문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사회에 보수 신문을 신뢰하거나, 혹은 선호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때문에 그동안 보수신문을 보던 독자들은 신문이 전하는 사실이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르다 할지라도, 나를 제외한 다수의 생각은 언론이 전하는 사실이 기준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쇠고기 정국에서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 많은 평범한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선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나와 내 가족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신문은 그것을 ‘일부 좌파 세력의 선동’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독자들이 받은 배신감은 컸을 것이다. 분명히 스스로 나왔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랬었다는 사실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 했는데, 신문이 나를 선동에 휘둘린 무뇌아처럼 표현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보수신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신문은 논조가 있고, 그 논조는 사설이나 칼럼을 통해 당당하게 전해져야한다. 기사에 대해 ‘써서 죽이고 빼서 죽인다’는 오해가 생기면 언론이 대중을 오도한다는 의심을 사게 된다. 물론 그 의심에는 증거가 없었지만 이번에 촛불시위가 그 증거가 된 것이다. 즉 팩트에 대한 전달은 그것이 진보언론이건 보수언론이건 기본적으로는 같아야 하고, 논조는 달라야 한다. 하지만 보수언론의 실수는 논조가 아닌 기사가 달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번에 생긴 신문에 대한 불신의 상처는 예상보다 깊고, 치유 역시 생각보다 더 길어질 것이다.

그 점에서는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진보언론의 기사를 읽어보면 신문을 보는것이 아니라, 마치 CCTV를 보는 듯하다. 물론 그 카메라도 ‘보여서 죽이고 감춰서 죽인다.’ 더구나 그 카메라 너머에 주장은 있으나 현실적인 대안이 부족하다. 이점에서 독자들의 진보언론에 대한 지지도 일시적 일 수 있다. 대중은 냉정하다. 어느 순간 대중이 진보언론이 보여주는 CCTV가 전체를 고루 비추지 않고, 대안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대중은 냉정하게 외면할 것이다.

결국 진보매체와 보수매체가 국면에 따라 ‘쓰고 빼기’를 하면 언론전체의 신뢰는 담보하기 어렵다. 그 점에서 다음 아고라에 대한 네티즌들의 쏠림현상은 언론에 대한 하나의 경고일 수 있다. 그것을 단순히 웹 2.0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치명적 오독(誤讀)이다.

지금 대중은 보수, 진보 양측의 주장을 공히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언론 양측 진영에 공히 비극이다. 이 기회에 언론이 환골탈태해야 한다. 언론이 전하는 사실은 항상 정확해야 하고, 주장은 당당해야 하며, 모든 주장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깊은 고민과 성찰, 그리고 대안이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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