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과 전인권이 부르는 '이메진'


   
 
  ▲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순망치한”이라고 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강건너 불보듯 한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지난 19일 서대문의 맨 길바닥에서 ‘거리문화제’를 보는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말이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7년전 이맘 때 나는 목동의 한 공원에서 열린 ‘문화제’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 때도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무관심이었다. 장장 9개월을 지속한 CBS의 파업은 무기한 단식을 거치고서야 끝이 났다.

아니, 더 나빠졌다. 당시의 파업은 사장의 경영능력과 정치적 행태 때문이었지 편집권 때문이 아니었다. 시사자키를 진행하던 내가, 정규 생방송에서 출연자들과 함께 조속한 타결을 요구할 수 있었고 매일 방송 시작과 끝 발언, 그리고 내 칼럼을 옮겨 다니면서 경영진을 비판했어도 피디 대신 진행을 맡은 부장들의 묵인 속에 3개월 동안이나(!) 방송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경영진이 편집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CBS의 빛나는 전통 덕이었다.

그러나 시사저널의 경우는 바로 편집권의 문제이다. 삼성의 눈치 때문에 인쇄 직전의 기사를 편집국장의 동의 없이 들어낸 것이 발단이었고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차례로 징계했다. 이 사태에는 삼성, 중앙일보, 고려대 인맥이 얽히고 설켜 있지만 그 본질은 자본에 의한 지배이다.

“이제 권력이 아니라 자본이 언론을 위협하리라”, 이미 15년 전에 김중배 선생이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사임하면서 한 예언은 또 한번, 그것도 아주 적나라한 형태로 이 땅에서 실현되었다.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이 한겨레나 경향도 마찬가지로 지배를 받는다. 금속노조의 광고가 실리지 못하고 건설계통 광고가 들어올 때는 재테크로서의 부동산 기사가 독자들을 현혹시킨다.

단지 시사저널 사태를 보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참에 우리가 지켜야 할 언론의 공공성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어떻게 하면 자본으로부터 그 공공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사실은 부동산, 교육, 의료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이 언론의 공공성에 관해 어떠한 합의를 하느냐에 따라 그에 걸맞은 정책이 동원될 수 있다. 어차피 광고비는 상품가격에 반영되어 국민이 부담한다.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대기업의 힘도 결국은 국민에게서 짜낸 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차피 국민의 돈이라면 세금으로 언론을 보조하여 광고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만일 꼭 광고가 필요한데도 돈이 없어 광고를 하지 못하는 중소기업이 있다면 일정한 조건 하에 광고 바우처를 지급할 수도 있다. 방송처럼 광고공사를 만들어서 일정 공식에 따라 배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높은 충성도를 가진 언론이라면 가격을 올릴 수 있다. 지역 언론을 보조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를 참조할 수도 있고 외국에 사례가 없다면 새로 만들면 그만이다.

시사저널 899호, 900호, 901호는 언론이라 보기 어렵다. 외국 방송의 표절, 이미 보도된 기사와 인터넷의 사례를 짜깁기한 기사, 과거에 실은 글의 재탕 등 각종 표절의 종합판이다. 자기만의 맛갈스러움을 가지고 있던 한 언론이 돈의 힘에 무너지고 있다. 입술이 없는데도 이가 시린지 모른다면 그는 이미 달콤한 돈의 힘에 굴복한 것이고 강 건너 불이 바람을 타고 내 발밑에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걸걸한 목소리의 전인권이 부르는 존 레논의 ‘이메진(imagine)’이 이렇게 들린다. “상상해 봐요.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우리 언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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