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충족적 예언자로서의 언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제목과 달리 계절을 더 타는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로 따지자면 15년하고도 몇 년을 더 지난, 더구나 음치인 나도 해가 바뀌는 때가 되면 그 쓸쓸한 노래가 귓가에 맴도니 하는 말이다.

담배연기처럼 멀어져 가는 것이 어찌 청춘 뿐이랴. 외환위기의 기억도 그렇게 멀어져간다. 1997년 가을 나는 영국에 있었다. 환율의 급변은 외국에 있어야 훨씬 더 실감나는 법이다. 한 갑에 1천원이던 담배값이 갑자기 1만원으로 돌변하는 경험이 어찌 그리 쉽겠는가.

9월29일 외환시장이 개장 40분 만에 문을 닫더니, 10월30일에는 8분 만에, 그리고 12월10일에 또 한번 40분 만에 시장은 기능을 상실했다. 원래 심리학 용어였던 ‘자기충족적 예언(selffufilling prophecy)’이 경제에서 통렬하게 적용되는 순간들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 머릿 속에는 달러의 수요 곡선이 오른 쪽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는 동영상이 찍히고 있었다. 사람들의 의심이 현실로 드러나면 예언은 다시 한 번 충족되고 아주 작은 계기만 주어져도 수요곡선은 다시 오른 쪽으로 훌쩍 뛸 준비를 하는, 파들 파들 떨리는 상황이 된다. 수요와 공급이 서로 대등하게 겨루면서 미세하게 가격이 조정되는, 경제학 교과서 상의 시장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치열한 떼거리 행동(herding)만 있을 뿐이다.

네덜란드의 튤립은 아주 희소한 역사적 사례이지만 세계화로 인해 각국 생산물 시장의 전반적 인플레이션이 잡힌 가운데 과잉 자본이 주식, 부동산시장 등 협소한 자산시장을 뒤흔드는 것은 이제 차라리 보편적인 현상이다.

기자협회보의 신년 첫 칼럼에 습기라곤 찾을 길이 없는 삭막한 경제 얘기를 하는 것은 언론이 바로 그 수요곡선의 이동에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한꺼번에 일관된 정책을 충분한 강도로 내 놓지 못한 것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번 지적했다.

그러나 또한 회의가 드는 것은 설사 내외부의 투기세력에 휘둘리지 않았다 해도 모든 언론이 동시에 부동산 값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과연 그 정책은 효과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또 언론 탓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냉엄한 ‘실제 상황’이다.

어쨌든 부동산 값은 계속 올랐고 애가 단 서민들은 돈을 빌려서 집을 사려는 대열에 합류했다. 다행히 종부세 납부율이 98%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기록했지만 일부 언론은 세금폭탄론으로 조세저항까지 유도했다. 70∼80%의 점유율을 가진 세 신문이 똑같은 논조를 유지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이들이 수요곡선을 좌지우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소 과장하자면 이들이 어느 순간 부동산 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기 시작하는 순간 버블은 붕괴할 것이다.

1999년 말, 모두 새 천년의 희망에 들떠 있을 때 나는 서민들에게 주식을 팔고, 빚을 줄이라고 호소했다. 다시 호소한다. 애써 구한 집이 아깝더라도 지금 팔고 빚을 갚는 것이 살 길이다. 우리 언론이 그런 위험을 예언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늦는다. 부동산 뿐 아니라 모든 가격의 급등, 급락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힘없는 사람들이다.

현 정부가 지금까지의 정책기조를 바꿔서 졸속의 확장정책을 쓰지 않는 한 거품은 조만간 꺼질 수밖에 없다.

어찌 부동산뿐이랴. 독과점 언론의 한 목소리는 그렇게 위험하다.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데도 팽팽히 맞서는 사안이 있다면 그것은 실은 반대의 목소리가 더 크다는 증거이다. 한미 FTA가 그 좋은 예이다.

김광석은 계절이 다시 돌아오는데도 돌아올 수 없는 사랑을 아파했지만 국민이, 언론이 냉정하다면 과거의 아픈 추억을 우리 사회가 다시 경험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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