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원로'



   
 
  ▲ 이활웅 재미 칼럼니스트  
8월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문제로 시끄러웠다. 8월 2일 이 문제를 처음 들고 나온 13명의 전 국방장관 등 일행 15명을 언론은 군의 ‘원로’라고 불렀다. 이에 고무된 예비역장성들은 8월 10일과 23일 성우회, 청룡회, 재향군인회, 각군 사관학교 동창회 등 예비역단체의 이름으로 전작권 환수반대 결의문과 성명을 발표했다. 또 8월 31일에는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과 군사령관 등을 지낸 77명이 이 문제를 다음 정권으로 넘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하다가 늙어 은퇴한 분들을 ‘원로’로 대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원로’의 참 뜻은 그 분야에 오래 종사했을 뿐 아니라 뚜렷한 공로가 있고 덕망이 높은 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월남에서는 보 구엔 지압(Vo Guyen Giap)장군을 ‘원로’로 대접한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젊어서 월남혁명군 창설에 가담하여 독학으로 전사(戰史)를 연구하고 실전에서 적과 싸우면서 전술을 익혀 1945년에는 일본군 격퇴작전을 지휘했다. 그 후 군총사령관이 된 그는 1954년 8년에 걸친 대불항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적군 1만6천명을 사로잡고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90년에 걸친 프랑스 식민지배의 목줄을 끊었다. 그리고 프랑스 대신 들어와 남 월남을 지배하며 통일을 방해하던 미국과 장장 14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 끝에 1975년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로 민족통일의 대업을 성사시켰다.



지압장군은 외세의 지배에서 민족을 해방시키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해야겠다는 집념이 자기의 군사적 성공의 기초가 됐다고 술회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그와 같은 장군이 한 사람도 없다. 금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이 전작권 환수방침을 언명하자 이임 직전의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즉각 한국군에게는 아직 전작권 독자수행능력이 없다고 받아넘겼다. 그런데 적어도 1천 명을 족히 넘을 한국의 현역, 예비역장성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다”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 오락가락한 논리로 전작권 환수를 반대하는 예비역장성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건군 60년이 다 되는 한국군 수뇌부에 아직 독자적 전작권 행사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군 수뇌부는 아내를 두고도 품을 줄 모르는 사내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한국군 요직을 거쳐 간 수많은 장성들은 총체적으로 미군 그늘에서 안이하게 세월 보낸 무능이나 태만을 문책 받아야 할 사람들이지 결코 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분들이 무슨 ‘원로’이며 그분들 말에 무슨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 분들이 ‘원로’를 자처하면서 숭미사대(崇美事大)만이 살길이라고 역설하는 것은 화자(火者·※참조)의 방사론(房事論)같은 소극(笑劇)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이 그분들을 통틀어 ‘원로’로 존대한 것은 언론의 전문성과 사회적 책임에 비추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전작권 반환을 원치 않던 미국이 이제 이를 돌려주겠다는 데에는 그들대로의 계산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권의 상징인 군의 전작권을 되돌려주겠다는데 군 장성을 지낸 분들이 못 받는다고 우기는 것은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가? 56년간이나 남의 손에 넘어가 있던 자기의 권한이다. 이제는 돌려받아야 한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지적했듯이 북한으로부터 남한에 대한 군사위협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 전작권 환수에 이보다 더 적절한 기회가 또 언제 있겠는가? 사실 이 문제는 시기적으로 보아 얼마든지 차분하고 슬기롭게 처리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일부 예비역장성들의 지각없는 정치관여와 내년 대선을 앞둔 야당의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인하여 일이 꼬이고 있다.



더 이상 나라의 체통을 잃지 않도록 예비역장병들은 물론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국민이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다.

※화자(火者)=조선시대 환관 후보자·고자와 비슷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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