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지원기금' 만들어 보자
편집위원회 | 입력
2005.09.28 09:48:30
“여러분, 제가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나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이 곳에 와보니 그 곳에서 제가 너무 앞만 보고 살았었다는 회한이 드는군요.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했던 게 아쉽습니다. 여러분, 시간이 있을 때 사랑하십시오.”
이 달 초 서울신문 조승진기자가 우리 곁을 떠났을 때 동료기자는 추모사를 통해 고인이 된 조기자의 회한과 남겨진 사랑에 대한 여한을 이렇게 대변해 주었다. 모두가 가슴이 젖어들며 울었다.
짙어만 가는 가을. 만추가 옷깃을 세우게 하기도 전에 비보가 잇따라 날아든다.
따스함과 예리함을 함께 버무려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바를 밝혀주시던 우리시대의 논설가 정운영 선배께서 별세하셨다. 이제 막 예순을 넘기신 연배이셔서 많은 후배들은 우레 소리에 놀란 듯 했다.
잠시 호흡을 고르는 새, 슬픈 소식은 또 왔다. CBS 여동욱 기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3개월전 간암 판정을 받고 끈질긴 투병 중이었다. 그 병마와의 투쟁은 CBS 회사전체의 성원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평소 선후배 궂은 일 잘 챙기는 민완이었던 여 기자는 부인과 어린 두 자녀의 애타는 발원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저 높은 하늘이 되레 서글프다.
언제부턴가 기자들은 사선(死線)에 서있다. 마치 목숨을 담보하고 뛰는 종군기자처럼. 오늘날 한국 기자들이 맞닥뜨리는 취재경쟁과 데드라인과의 싸움은 가공할만한 수준이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 쏟아내는 기사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찬찬한 취재와 취재원과의 진지한 인터뷰는 시간싸움에 밀려나 전화 한 통화로 대체되고 만다. 그 숨 가쁜 소용돌이 속에서 저널리즘을 향한 풋풋한 야망은 실종되고 만다. 그 결과 진실의 뉴스를 생산하는 자부심은 스러지고 기계적인 타성은 온 몸을 휘감고 만다.
40대 기자들이 벌써 흔들리다니…. 기자생활 십오 년 만에 벌써 심신에 녹이 끼고 축적된 스트레스는 암초로 자리 잡는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이렇게 가까이서 배회한 적이 없었다. 물론 애당초 웰빙하자고 기자를 택하진 않았다. 잘 먹고 잘 살며 특권을 누려보자고 비판의 칼을 잡진 않았다. 힘든 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멋진 여정이라 여겼다. 흔쾌히 걷고 싶었다. 또 부단히 썼고 열심히 만나고 살았다. 그 결과는….
한국의 모든 기자들에 고한다. 이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사그라지는 기자의 정열은 재탄생돼야 한다. 그 열정은 제대로 된 저널리즘 환경을 복구함으로써 다시 불붙을 수 있다. 일상 속에 야금야금 파고드는 패배주의와 노곤함은 언론사측, 노동조합, 기자협회 조직, 많은 기자 커뮤니티, 관련 언론단체들을 통해 일선 기자들이 당당하게 발언하고 고함지를 때 물리칠 수 있다. 한솥밥을 먹던 우리들의 동료가 멀리 떠났을 때 그저 ‘산업재해 처리’ 하나에 목매달고 있는 우리들의 신세가 너무 가엽다.
기자가 요절한 뒤 남은 가족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란 말인가. 기를 쓰고 유족연금이 많은 보험 상품을 살아생전에 알아서 챙기란 말인가. 한창 공부할 유자녀들의 생활을 상상하면 아찔하다. 이제 우리 기자들 스스로 일어나 ‘유족지원기금’이라도 만들어야겠다. 동원 가능한 상호 부조시스템을 구축하자. 가만히 있을 때 다가오는 것은 냉소뿐이다. 우리가 만들어 낼 때 우리 것이 된다. 잇단 기자들의 스러짐이 계기가 되어 기자의 삶을 조금 더 보람 있게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순전히 먼저 간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