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형, 미국에서는 지난 22년 간 의 저녁뉴스 앵커로 활약했던 피터 제닝스씨가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뜬 일이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파원 시절부터 시작해 벌써 5년째인 이 곳 워싱턴 생활 중 줄곧 제닝스씨를 통해 미국과 세계 뉴스를 접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터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제닝스씨의 부음을 전한 미국 언론의 보도는 그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 첫 머리에서 제닝스씨의 스타일은 절제된 것이었고, 말은 권위가 있었으며 태도는 차분했다고 평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그를 품위있고 균형있는 언론인으로 평가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띄더군요. 우선은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느낌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고, 또 그 같은 덕목이야말로 작금의 우리 언론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란 생각에서였습니다.
기자로서 제닝스씨는 “Every time I see a coin, I instinctively want to look at the other side”란 말을 했습니다. 공정하고 균형된 보도를 강조한 것일 텐데 사실 기자라면 누구나 보도의 기본원칙 중 하나로 이에 대해 모를 리 없겠지만 요즘 우리 언론에선 이 것을 별로 찾을 수 없어 유감입니다.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하고 있는 이른바 X파일과 관련한 보도는 가까운 예로 생각됩니다. 언론들이 지적한 대로 이 일은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적인 개인 사생활 침해와 재계, 언론, 정치권의 기득권층에 의한 저열한 행태가 핵심입니다. 하지만 정작 언론의 보도는 이 두 가지를 어느 하나 소홀히 함이 없이 엄정하게 다루기보다는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자사 이기주의니 경쟁사 공격에 더 관심이 있다느니 하면서 언론을 비판하는데 딱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균형보도와는 다소 다른 얘기지만 지난달 평택 미군기지 시위와 관련해서도 시민단체들의 `경찰 과잉진압’ 주장과 경찰의 `시위대 불법폭력 행위' 발표’에서 언론이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해 보도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러니 일반국민의 입장에서는 언론이 공기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그저 편 나누기만 부추긴다는 생각을 가질 법도 합니다. 나는 시위 때마다 제기되는 이런 논란에 대해 미국처럼 `경찰 저지선(police line)’을 과잉진압과 불법시위 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공권력도 이제 군부독재 시절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작지만 이런 것부터 분명한 원칙을 마련하는 것이 개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L형, 언젠가 언론을 가장 불신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이 언론의 취재대상이 돼 본 사람들이란 말을 내게 한 적이 있지요. 사실 기자들에게는 뼈아픈 말인데, 언론이 무엇이든 사안의 전체를 보려 하기보다는 보도하고 싶은 것만 보고 있다는 생각이 요즘엔 부쩍 더 많이 듭니다.
앞서 피터 제닝스씨의 품위에 대해 말한 것은 언론이 제 할 말을 하면서도 표현은 순화하고 또 별 의미 없는 흥미위주의 신변잡기성 기사는 떨궈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얼마 전 X파일과 관련해 자사 기자가 검찰에 출두하게 된 데 대해 MBC 노조가 낸 성명은 무척 실망스럽더군요. 검찰이 만일 자사 기자를 소환 수사하는 것으로 검찰수사에 쏠린 국민들의 시선을 어딘 가로 돌려보려 한다면 검찰은 곧 백배 천배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란 내용인데, 섬뜩한 느낌에 거부감부터 들었습니다. 언론의 표현이 외교적 수사처럼 돼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증오로 가득한 듯 전투적인 것은 더욱 문제가 아닐까요.
L형, 지금 우리나라는 참 여러 면에서 혼란스럽고 또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언론이 중심을 잡고 정론직필을 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두서 없는 글을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날이 무척 덥습니다.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