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선택' 표현, 자살률 감소 효과 없다는게 학계 중론"

기협·생명존중희망재단 주최 '2023 사건기자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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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도에서 ‘극단적 선택’ 표현을 사용하는 게 맞는지, 만일 쓰지 않는다면 어떤 표현이 적절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주최로 9일 제주시 오션스위츠 제주호텔에서 열린 ‘2023 사건기자 세미나’ 현장의 풍경이다. 세미나는 언론사 사회부 경찰 기자 등을 중심으로 발전적인 자살보도 방식을 고민하고 현장의 딜레마를 공유하는 자리로 마련돼 왔고, 이번엔 역대 최대 규모라 할 90여명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번 세미나 핵심 키워드는 단연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이었다. 가장 최신 버전 자살보도 관련 가이드라인 ‘자살보도 권고기준 3.0’에도 최소보도 원칙을 기본으로 ‘사망’ ‘숨지다’ 등을 사용해달라는 내용이 있을 뿐 이 표현은 포함돼 있지 않다. ‘자살’이란 직접적 표현을 피해 자살보도 부작용을 줄이려던 과거 논의와 업계 고민의 흔적이 이어지는 경우이지만 최근 ‘자살을 선택지로 인식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지난해 몇몇 정신의학과 전문가들이 ‘완곡한 용어 사용이 자살을 예방한다는 근거가 없다’ ‘해외 언론에선 자살로 기술한다’ 등 입장을 밝히며 언론계에 던져진 고민이 현장 기자들에게 옮겨간 모습이었다.

'2023 사건기자 세미나'가 9일 제주 오션스위츠 제주호텔에서 열렸다. 사진은 두 번째 발제 후 토론 중인 참석자들. (왼쪽부터) 민경석 영남일보 기자, 김소영 동아일보 기자, 좌장 권영철 CBS 대기자, 발제자 이승환 뉴스1 사건팀 팀장, 위준영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자살예방홍보부 부장,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대체로 기자들은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 자체를 쓰지 않는 데 동의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반면 ‘자살’이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데선 여러 의견이 나왔다. 두 번째 발제 ‘극단선택은 누구의 선택인가’를 발표한 이승환 뉴스1 사건팀 팀장은 송파 세모녀 사건, 故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처럼 시스템을 고발한 자살보도는 한다는 원칙을 설명하며 ‘극단선택’이란 표현이 죽음을 ‘개인 문제’로 인식시키거나 자살을 선택지 중 하나로 생각하게 할 소지, 유족의 죄책감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전했지만 ‘자살’이란 직접적인 표기엔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 팀장은 “사건기사 작성 시 언어를 순화해 쓰는 건 필수적이고 이에 강간은 ‘성폭력’으로, 식칼은 ‘흉기’로, 자살은 ‘숨진 채 발견’으로 쓰고 있다. 언어를 순화함으로써 따르는 효과도 있는데 후배기자에게 ‘자살이라고 쓰면 안돼, 권고기준에 어긋나’ 함으로써 기자가 ‘자살보도는 신중히 써야되는군요. 지킬 게 또 뭐가 있죠?’ 이런 인식을 심어준다. 자칫 이런 부수적인 효과가 약화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 “배우 최진실씨가 돌아가셨을 때 직후 비슷한 나이의 우울증 환자를 잃었다는 정신과 권위자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최씨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방법을 알게 됐을까. 언론이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이란 게 현장에서 괴리를 느끼고 꼭 지켜야되냐는 말을 선후배에게 들을 때도 있는데 권고기준이 있음으로 인해서 자살보도를 신중해야 한다는 인식을 기자들에게 심어주는 거고, 그래서 더 좋은 보도를 고민하는 배경이 된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어진 토론에서 김소영 동아일보 기자도 “‘극단적 선택’이 적절치 않다는 데 동의한다”면서 “실제 자살률 감소 효과도 없다는 학계 중론 등을 고려하면 부작용만 남은 용어를 쓸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는 “현장 기자로서 고민은 그럼 뭐라고 쓸 거냐는 것인데, 다른 순화용어를 고민하는 건 ‘극단적 선택’ 용어가 지녔던 부작용을 재생산 하게 되는 걸로 보인다”며 “자살이란 단어를 그대로 쓸 순 없고, ‘사망’이나 ‘죽음’으론 표현 안 되는 의미가 있어 관행적으로 써온 부분이 현장 기자의 딜레마였는데 자살을 자살이라 그대로 사용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살’ 단어를 쓰더라도 수단이나 방법의 구체적인 서술을 하지 않고, 유족에게 상처가 될 부분을 빼고 위험군에 필요한 정보를 포함시키는 등 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며 “유족 등 자살 고위험군이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건강하게 계속 잘 살아간다는 걸 보도하면 자살 감소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봤는데, 용어에서 나아가 뉴스룸 내 섬세한 고민과 소통이 필요해보인다”고 부연했다.

'2023 사건기자 세미나'가 9일 제주 오션스위츠 제주호텔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이승엽 한국일보 기자, 양영유 단국미디어센터 센터장, 좌장 권영철 CBS 대기자,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정애 SBS미래팀장이 첫 발제 이후 토론을 하고 있다.

위준영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자살예방홍보부 부장은 “권고기준을 만들 때 취지는 자살사건보도가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망 요인은 다양하지만 특히 자살에 대해 우리 국민이 받아들이는 자극의 정도가 다른 것 같다는 인식이 배경에 있었다”며 “극단적 선택 표현은 권고기준엔 없는 내용이지만 고민과 공감의 결과로 나온 표현이라 양가적 감정이 있다. 다만 과거 국민 패널을 대상으로 진행한 모니터링에서 ‘힘들면 자살할 수도 있다’는 가치판단이 내재된 것같다는 인상을 많이 받아 고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 적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자살’을 '자살'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선 최진실씨 때부터 현장 모니터링을 한 실무자 입장에서 다시 예전 풍경으로 돌아갈까 두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라이브 방송으로 자살’을 하는 사례 등이 잇따르는 극단적인 상황을 언급하며 용어 자체에 대한 논의를 넘어 언론에서 보다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자살을 옵션으로 두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자살률은 안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선 일부러라도 ‘선택’이란 말을 없애고 선언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용어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해선 끝이 없을 것 같다. 자살보도 하단에 언론사들이 넣고 있는 핫라인 예방 메시지 등을 길게 늘리거나 아예 기사 앞에 넣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용어 말고도 다른 장치로 자살률을 떨어뜨릴 수 있는 넛지는 충분히 있고, 본격 고민을 안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2023 사건기자 세미나'가 9일 제주 오션스위츠 제주호텔에서 열렸다. 유현재 교수가 자살보도 권고기준 4.0과 관련해 발표하는 모습.

이날 세미나 첫 번째 발제에선 ‘자살보도 권고기준 4.0’ 관련 제안이 소개되기도 했다. 2004년 처음 제정돼 2013년 2.0, 2018년 3.0 버전으로 두 차례 개정된 준칙은 그간 국내 언론의 자살사건보도 감수성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해왔고, 비교적 잘 준수되는 가이드라인으로 꼽혀왔다. 다만 한 때 사용되던 ‘동반자살’이란 용어가 현재 ‘살해 후 자살’ 등으로 쓰이고, ‘극단적 선택’ 표현이 이번에 지적됐듯, 시대 변화와 상황에 따라 준칙은 지속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이날 유 교수는 유튜브와 쇼츠 등을 자살보도 권고기준 대상에 포함시킨 안을 선보였다.

총 10개 항으로 제안된 안은, △자살은 ‘선택’일 수 없다(가급적 ‘사망’ 사용, ‘자살’은 맥락에 따라 제한적 활용) △라이브 방송 자살, SNS 유서 등 디지털 미디어 연관 자살의 자세한 전파 지양 △자살보도 관련 유튜브 활동 삼가 △쇼츠 등을 통한 자살 디지털 콘텐츠 확산 예방 노력 △자살보도에 포함된 예방 메시지 가독성 높이는 추가 노력 △평소 자살문제 해결 위한 심층보도 권장 △디지털 유서 및 유서형식 영상 유통 지양 △과거 SNS 콘텐츠 자료화면 사용 자제 △기성언론 온라인콘텐츠 썸네일, 헤드라인 자극적 문구 지양 △도구, 장소, 동기 등 모방요소 보도 지양 등 내용을 포함했다.

참석 기자들에게선 ‘유튜브’ 등을 권고기준 범주로 포함한 데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실질적으로 언론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유튜브 등에서 유명인의 자살과 관련한 허위영상이 넘쳐나고 실제 암시한 영상을 업로드 한 끝에 자살을 한 사건이 벌어지는 만큼 대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였다. 향후 논의와 수정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제언, 질문 등도 따랐다.

이승엽 한국일보 기자는 “유튜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유튜버들이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실질적으로 지키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면서 “기성 미디어에선 인권이나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어느 정도 합의가 있고 권고기준을 지켜와 성숙단계에 이르렀다면 유튜버는 그렇지 않고, 또 개인 사업자인데 안 지킨다고 했을 때 강제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어려워보인다. 또 라이브가 많은데 정제되지 않은 언어가 송출됐을 때 이 권고기준이 어떻게 활용됐을지도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이정애 SBS 미래팀장이 9일 '2023 사건기자 세미나'에서 '저널리즘과 트라우마'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세미나엔 90여명 기자가 참석했다.

특강에선 언론인 트라우마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정애 SBS미래팀장이 ‘저널리즘과 트라우마’에 대해 강의를 진행했다. 지난 2021년 한국기자협회, 여성기자협회, 다트센터, 구글뉴스 이니셔티브는 ‘한국 언론인 10명 가운데 8명이 트라우마 경험이 있다’는 국내 언론계 첫 언론인 트라우마 현환 관련 설문결과를 공개했고, 이 중 ‘자살 사건’(50.5%)은 사건사고별로 봤을 때 희생자·유족 관련(61.3%), 아동학대(57%)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범주였다.

이 팀장은 개인의 경험과 자사의 트라우마 관련 대응 원칙 등을 전하며 “건강한 저널리스트는 건강한 저널리즘의 전제조건이고 이는 지속가능한 언론 기업의 요건이란 점에서 기자 심리적 외상에 언론사가 더 관심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기자 개인들에겐,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는 취재원에게 “전화해도 되는 시간을 알려주는” 등 경계를 그을 필요성, 사회적으로 지지를 해줄 네트워크를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의 중요성 등도 설명했다.

언론사들이 자살보도 하단 등에 넣고 있는 자살 예방을 위한 핫라인 번호가 내년부터 기존 1393에서 109로 바뀐다. 관련 보도를 쓸 때 참고할 만하다. 사진은 이날 세미나장 앞에 놓인 배너 거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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