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TALK] (11) 표현의 자유와 상호불신

6월 초순, 사단법인 서울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하 ‘서울 민예총’)이 주최한 전시회에 출품된 한 작품이 언론계와 예술계 모두의 뜨거운 쟁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작품, ‘기자 캐리커처’는 광주에서 열린 <굿바이 시즌2>에 출품되었습니다. 여기에는 100명 이상의 전⋅현직 언론인, 방송인, 정치인의 얼굴이 캐리커처화되어 있고, 이들 얼굴에 붉은 색이 덧칠되어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여기에는 일부 ‘유명인’들이 포함된 것에 주목하였지만, 현직 언론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표현의 자유, 기자와 예술가의 갈등?

이 글에서 전시회가 과연 한국기자협회의 주장처럼 “언론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는지, 혹은 “언론의 자유와 기자들의 인권을 방패 삼아 예술가들의 작품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지 직접 따져보지는 않겠습니다. 이 사안은 개별 언론사는 물론 한국기자협회 차원에서의 법적 소송이 예고되어 있습니다(실제 소송으로 이어질 것인지는 조금 추이를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아무쪼록 양측이 서로에게 제기된 여러 오해를 풀 수 있는 원만한 해결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아무튼 이런 충돌은 연구자인 저로서도 처음 보는 풍경입니다. 언론의 자유를 지켜야 할 집단과 예술의 자유를 지켜야 할 집단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으로 언론의 자유이든 예술의 자유이든, 모두 ‘표현의 자유’의 구성요소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 보나 실정법상으로 보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모두의 권리입니다. 그러니 양측 모두 격앙된 분노를 조금 잠재우고, 양자가 서로의 권리를 ‘부인’하는 듯 보이는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자와 예술가가 ‘표현의 자유’의 내용을 놓고 서로 다투는 모양새는 많이 어색하지 않을까요. 언론과 예술은 모두 표현의 자유의 양대 보루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말씀 드리는 이유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의 현 주소

그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역시 한국 언론을 둘러싼 신뢰 혹은 불신이는 오랜 쟁점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물론 한국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론 선진국으로 인식하는 대다수 국가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옥스퍼드대학교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2022년 신뢰도 조사 최하위 국가는 (2년 연속으로) 미국이었습니다. 한국은 2020년까지 4년 연속 최하위였다가, 이제 꼴찌를 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물론 여전히 최하위권입니다). 드러난 지표상으로 그렇습니다. 이 지표가 얼마나 객관적인지 질문해 볼 수는 있겠지만, 어떻든 한국 언론을 향한 대중들의 시선이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지켜보면 이제 언론인과 대중 모두가 서로를 불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기레기’라는 멸칭도 이미 1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에 대응해 학계나 언론계에서 대중들의 ‘편향된’ 뉴스 소비를 지적해 왔습니다. ‘정의로운 언론’과 ‘현명한 독자’들을 기본값으로 상정하던 과거의 믿음은 모두에게 사라진 것 같습니다. 뉴스를 무료로 포털로만 본다, 돈을 내지 않는 독자가 아무 비판이나 한다, 편향된 사고에 유튜브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혹은 내가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본다, 기성 언론은 우리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들은 편향된 보도로 오직 힘 있는 자들에게 봉사한다, 기성 언론 보도는 거의 다 가짜뉴스이다 등의 언어가 이 시대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나 기자에게는 얼마든지 욕설을 내뱉을 수 있다는 생각도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언론의 정파성이라는 이슈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한국 언론에 제기되었던 오랜 질문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이제 대중들의 정파성, 정파적 뉴스 소비, 그리고 이를 효율적으로 가능케 하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라는 문제와 함께 뒤엉켜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언론인과 대중의 상호 불신이 극한으로 치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무슨 해결책이 있을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언론인과 대중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저널리즘 윤리 교육을 강화하면 해결될까요? 저는 오랜 시간이 들지만 이런 노력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누가 어떻게 무엇을 교육해야 더 효과가 있을지는 불분명합니다.

상호불신 넘기 위한 첫걸음 – 무엇부터 먼저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할 것인가

이번 전시회 사건, 그리고 소송 건을 보면서 이 문제를 새삼스레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문제 해결의 방안을 찾는 길을 주어진 이슈들의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는 몇 가지 전제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다소 학술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하자면, 저는 한국 언론에서 나타나는 이런 상호 불신의 양상에 대한 성찰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도 깊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언론에 대한 문제부터 먼저 거론해 보겠습니다. 최근 수 년 동안 언론이 스스로 대중들의 정파적 뉴스 소비, 곧 ‘편향된 뉴스 소비’를 둘러싼 문제 제기가 지나치게 커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특별히 신뢰하거나 불신하는 언론인들의 행동이나 가치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부족한 편입니다. 많은 대중들이 ‘해장국 언론’을 바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모든 뉴스를 그렇게 소비하지는 않습니다. 수용자 개인의 뉴스에 대한 취향, 특정 언론사 브랜드와의 오랜 교류의 경험, 전체 사회 제도에 대한 신뢰도의 변화와 같은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 신뢰도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언론인들이 생각하는 만큼 대중들이 저널리즘 가치나 규범에 정통하여 이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만큼 대중들의 경험과 가치는 매우 모호하고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많은 학술 연구들은 이런 내용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우연적’이라고 평가하느냐? 언론인과 대중들의 차이는 이런 식입니다. 언론인들의 저널리즘에 대한 가치나 규범처럼, 대중들도 나름대로 그러한 가치나 규범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중들은 일반적으로 사안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부재를 지적하지만, 사실 현대 사회의 대중들은 이미 학교에서든 어디서든 언론에 대해 매우 많은 ‘나름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 방식의 차이는 작은 차이를 매우 크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정 보도에서 실수나 오보가 있으면, 언론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게’ 평가하는 편이었습니다. 사람이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또 과도한 업무 부담이나 포털 중심적 뉴스 유통 환경이 체계적으로 이런 현상을 낳는다는 걸 누구나 뼈저리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런 문제에 절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는 훨씬 ‘사소한’ 오류나 실수들에 대해 대중들은 ‘기본’을 거론하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게다가 자신과 관련된 일로 한번 그런 경험을 하면, 그 사람의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거의 ‘평생’ 회복되기 어려운 불신으로 돌변합니다. 그런데 언론인들은 이런 문제가 자꾸만 해결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노동 환경이 더 이상의 품질 개선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원론적’인 것이고, ‘자신들의 해결 범위를 넘어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론과 대중의 정파성이란 거창한 용어는 이러한 오해를 한층 극복 불가능한 주제인 것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민감성의 차이, 우연적 사건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가 뉴스 신뢰와 불신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전시회 사건도 이런 상호 불신이 낳은 웃지 못할 한 장면이라고 판단하고 싶습니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나 불신은 이런 식의 극단적인 대응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서로 다가서는 노력이 즉각 필요할 것입니다. 여전히 생각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장국 언론’이라는 진단은 현실의 한 단면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지만, 그만큼 역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이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되면, 대중들의 ‘더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을 향한 매우 구체적인 차원의 요구를 별달리 주목하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또 그 점을 항의하는 대중들의 목소리, 직접 참여의 행동들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중들의 불신’으로 쉽사리 단정 지을 가능성을 높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저 역시 논란이 된 이번 전시회의 출품작이 특정 언론인을 ‘기레기’로 ‘박제’하는 행위였고 그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한층 심층적인 고민을 새로 시작하는 계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지혜가 언론 종사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부족한 생각이지만, 이런 발언을 통해 앞으로 그런 생산적인 계기가 빨리 마련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진우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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