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성추행 시 여성 기자 10명 중 9명, 공론화보다 침묵 택해

한국여성기자협회 '한국 여성 기자의 업무 실태 및 직무에 대한 인식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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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등에 노출됐을 때 여성 기자들 대다수는 공론화보다 침묵을 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기자협회의 ‘한국 여성 기자의 업무 실태 및 직무에 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여성 기자들의 85.7%는 성희롱 등의 경험에 노출됐을 때 공론화보다 침묵을 선택했다. 공론화했다는 응답은 14.3%에 불과했다.

공론화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조사에 참여한 693명 가운데 절반가량인 364명(46.6%)이 이렇게 답했고, 그 뒤를 ‘당황해서(20.2%)’, ‘취재에 방해될 우려(14.0%)’, ‘승진 등에서 불이익 우려(9.1%)’ 등이 따랐다. 공론화 이후 실제 불이익이 있었는지 묻는 질문엔 불이익이 없었다는 응답이 39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심리적 압박감(39명)’이나 ‘악의적 소문(22명)’, ‘업무상 부당한 대우(12명)’와 ‘비난 혹은 따돌림(9명)’을 겪었다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공론화 이후 회사의 대처에 관한 질문에서도 조치가 없었다는 응답이 25.3%에 이르렀다.

성희롱과 성추행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여성 기자들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응답이 가능한 9개의 관련 질문에 모두 ‘없다’고 답한 사람은 97명(14.0%)에 불과했고, ‘성적인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들은 적이 있다’, ‘미인이다 등 외모, 옷차림, 몸매 등을 언급해 불쾌했다’는 문항에 많은 기자들이 있다고 답했다. 성희롱과 성추행이 빈번한 주체는 취재원과 사내 상사였고, 추행이 발생한 주된 장소로는 ‘취재원과의 회식(42.5%)’, ‘사내 회식(36.6%)’ 등이 꼽혔다. 다만 2018년 본격화한 ‘미투’ 운동 이후, 여성 기자들은 기자 사회와 취재원의 성희롱 관련 행위가 다소 줄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업무 차별은 크지 않다고 여겨

여성 기자는 업무와 관련해선 남성에 비해 차별이 크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근무 부서의 경우에도 응답자의 54.8%가 정치, 경제, 사회 등 이른바 주요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전체의 70.3%가 희망부서에서 일하고 있다고 답했다. 여성기자협회가 1990년 실시한 실태조사와 비교하면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데, 당시 조사에서 여성 기자가 많이 근무한 부서는 ‘조사·교열부(31.7%)’, ‘문화·생활부(24.4%)’ 등이었고 정치, 경제, 사회부 근무자는 7.7%에 불과했다. 희망하지 않는 부서에서 근무하는 이유도 지난 30여 년간 확연히 달라져서, 과거엔 ‘인사권자의 성편견(25.6%)’, ‘남성 위주의 취재관행(21.1%)’ 등이 주된 이유로 꼽혔다면 이번 조사에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서(22.8%)’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다만 기자 조직에서 여성 리더는 아직도 부족하기만 하다. 기자들은 언론사 내부에서 여성 고위직이 부족한 주된 이유로 여성 기자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 편견(5점 만점 중 3.57점)을 꼽았다. 인적 네트워크의 부족(3.34점)이나 줄서기·정치력 부족(3.28점)에 동의하는 응답도 많았다. 반면 여성 기자의 자질 부족(1.96점)이나 업무 회피(2.17점) 등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에 있어선 여성 기자들은 다소 혼재된 응답을 보였다. 관련 인식 조사에서 여성 기자들은 바쁜 기자 업무가 결혼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3.99점)면서도 결혼한 뒤에도 업무를 잘 할 수 있다(3.93점)고 답했다. 양육 부담과 관련한 질문에서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해 미안함이 크다(4.26점)’, ‘자녀 교육에 시간을 쏟을 수 없어 불안하다(4.08점)’ 문항엔 동의 정도가 높은 반면 ‘자녀 교육 문제로 일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문항의 점수는 3.23점으로 가장 낮았다.

응답자 42.7% 이직 고려…다시 직업 선택할 수 있다면 59.2% '기자 NO'

최근 언론인의 이직과 퇴직이 급증하면서 이직 경험과 의도를 묻는 질문도 있었다. 그 결과 응답자의 47.2%(327명)는 ‘지난 1년 동안 이직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그 중 141명이 동종 업계로의 이직을, 186명이 이종 업계로의 이직을 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낮은 임금수준과 복지 및 언론 산업의 혁신 부족 등 열악한 근무 여건이 주된 이유인 것으로 드러났다.

직업을 선택할 때의 기대에 비해 충족 정도도 전반적으로 낮았다. 여성 기자들에 직업 선택의 동기와 충족도를 물은 결과 기대와 충족 간 가장 괴리가 큰 항목은 ‘일이 재미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다’, ‘사회 공익에 기여할 수 있다’ 등이었다. 즉, 기자라는 일이 기대한 것보다 재미없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사회 공익에도 기여하기 어렵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기자를 선택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도 ‘그렇다(40.8%)’는 응답자보다 ‘그렇지 않다(59.2%)’는 응답자가 더 많았다.

이번 조사는 여성기자협회가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에 의뢰해 진행됐다. 지난해 5월25일부터 6월9일까지 온라인 조사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협회 소속 31개 언론사 기자 1464명 중 693명(47.3%)이 참여했다. 설문 문항은 △직​업 선택의 동기 및 충족과 이직 의도 △직장 내외에서 겪는 고충과 차별 △여성으로서 겪는 일과 가정의 양립 △기자로서의 역량 및 직무 스트레스 등으로 구성됐다. 여성기자협회는 최근 발간한 여성 기자 31명의 에세이 모음집, ‘유리는 깨질 때 더 빛난다’에 이나연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쓴 이번 조사 결과를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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