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갈림길서 의연했던 안종필… "우리의 고난, 모든 사람에 대한 속죄"

[저널리즘 타임머신] (61) 기자협회보 1980년 2월 25일

  • 페이스북
  • 트위치

지난달 17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결성 46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동아투위는 한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은 자유언론실천 선언에 나선 언론인들이 결성한 단체다. 동아투위 113명 가운데 고 안종필 위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고 안종필 위원장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 3월17일 회사로부터 쫓겨났을 당시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이었으며 1977년 5월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유신체제 말기 자유언론수호에 앞장섰다.

안종필이 이끌던 동아투위는 1978년 10·24선언 4주년 기념식에서 배포한 동아투위소식지에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일지(민권일지)’ 125건을 실었다.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1년 동안 제도언론이 외면한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종합해서 알린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투위소식지에 실린 민권일지를 문제 삼아 안종필 등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구속과 투옥은 안종필 위원장의 죽음을 가져왔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10·26사태로 무너진 뒤인 1979년 12월4일 출감했지만 투옥 중 얻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80년 2월29일 별세했다. 당시 43세였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은 “서울대병원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고 적었다.


기자협회보는 타계 직전인 그해 2월13일 안종필 위원장을 인터뷰한 기사를 실었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안 위원장이 간암 선고를 받은 것은 출옥 직후였고 당시 3개월을 넘기가 어렵다는 병원 측의 진단을 받은 상황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서 절망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기사는 전했다.


그는 병실을 방문한 기자협회보 기자에게 투병 얘기보다는 해직기자의 조속한 복직과 언론계에 대한 심경을 피력했다. “10·26사태 후 몇몇 신문에서 반성하는 글이 나오는 등 언론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행동의 표시가 없어 아쉽습니다. 70년대 우리 언론의 가장 큰 희생자인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복직되지 않고 어떻게 언론이 반성하거나 회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또 동아투위의 일원으로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면서 “우리가 겪은 지난날의 고난은 자유언론과 민주를 위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속죄라고 자부하고 있다”고 했다. 동아투위는 1987년 ‘안종필 자유언론상’을 제정해 그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기자협회보 1980년 2월25일자 8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 전문

<간암과 투병중인 안종필씨>

한 동료 언론인이 간암이라는 치명적인 병고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고 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안종필 위원장이 현대 의학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간암진단을 받고 원자력병원 301호실에서 2개월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 최근에는 병원에 머무를 필요조차 없어 집에 돌아와 하늘의 뜻만 기다리는 시한생명의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병원당국과 안 기자의 간병을 맡고 있는 동료들의 얘기에 의하면 안 기자가 간암선고를 받은 것은 출옥 직후인 지난해 12월17일. 당시 3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병원 측의 진단이고 보면 안 기자는 앞으로 1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운 상태라는 게 주변의 얘기다.

그러나 2월13일 필자가 안 기자의 입원실에 들렀을 때 의외로 초연한 안 기자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기자의 어느 구석에서도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착하고 의연한 안 기자의 태도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라기보다는 곧 회복되어 퇴원하려는 건강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기자는 필자를 대하자 투병 얘기보다는 먼저 해직기자 문제와 현 언론계에 대해 침착하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10·26사태 후 몇몇 신문에서 반성하는 글이 나오는 등 언론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행동의 표시가 없어 아쉽습니다. 70년대 우리 언론의 가장 큰 희생자인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복직되지 않고 어떻게 언론이 반성하거나 회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언론계는 해직기자의 복직문제를 스스로의 의무로 알고 뜨거운 성원과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안 기자는 이어 동아 해직기자들의 현재 입장과 태도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해직언론인 110여명은 단결된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왔고 항상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싸워왔기 때문에 사회 각계로부터 격려와 성원을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복직되어야 하며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가르침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볼 때 동아일보에 남아있는 사람이나 저희들이 다같은 희생자라고 봅니다. 이제 동아일보 경영진이나 남아 있는 사람, 그리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 다함께 손을 잡고 좋은 신문을 만들어 국민들에 보답해야 할 때입니다.”

안 기자는 또 동아 해직기자들의 지난 5년간의 발자취를 회고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고 술회했다.

“70년대 한국언론사에서 동아·조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메울 수 있었겠는가라는 어느 동료기자의 글을 읽고 제자신 지난 5년을 성찰해보았습니다. 우리가 겪은 지난날의 고난은 자유언론과 민주를 위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속죄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가 결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라는 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끝으로 자신의 현재 투병심경을 “이미 생사를 초월, 모든 것이 안정되고 편안함속에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난 5년간의 생활처럼 기어이 병상에서 일어나 신문사에 복직하여 신문을 만들겠다”고 강렬한 투병 의지를 보여주었는가하면 가족문제에 대해서는 “아내와 두 자식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있다”고 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을 보여주기도 했다.

안 기자와 대담이 끝나자 간병을 맡고 있는 이병주 위원장 대리, 권근술·정동익씨 등 동료·후배들은 “안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입원하여 병명을 모르고 있다가 최근 2주전쯤 자신이 치명적인 간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투병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안 위원장이 꼭 병석에서 일어나 복직하고 오는 3월17일 투위 창립 5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하겠다고 말하고 있어 오히려 동료들이 용기와 위로를 받고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한편 안 기자의 간병소위원회 간사인 권근술 기자는 안 기자의 입원소식을 전해듣고 각계에서 2개월동안 1천여명의 문병객이 다녀갔다고 밝히고 그분들에 감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안 기자는 1937년생으로 부산 경남고·한국외국어대학 영어학과를 졸업, 63년 부산일보에 입사,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66년 동아일보에 입사, 편집부 차장을 지냈으며 당시 기자협회 분회장을 맡았었다.

김성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