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농사꾼·일용직 잡부·심플라이프 전도사…기자들의 인생 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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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그 후’는 불현듯 찾아온다. 생각지도 못한 명예퇴직에 의해, 어느 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끝에, 또는 강렬한 이끌림에 의해. 그 시기와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기자 이후의 삶은 피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온다. 기자협회보는 그 중에서도 누구보다 사람 냄새나는 인생 2막을 연 기자 세 명을 만났다. 그 길은 생각보다 고달프고 거칠었지만 그들의 도전은 빛났다.



초록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커피농사꾼
전남 담양서 커피농장 운영 임영주 전 기자


전라남도 담양군에는 커피향 그윽한 커피농장이 있다. 커피농사꾼 임영주 전 기자가 운영하는 커피의, 커피에 의한, 커피를 위한 농장이다. 그는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커피의 꽃말인 ‘언제나 당신과 함께’처럼 언제까지고 커피와 희로애락 하는 삶이다.


중앙일보, 뉴시스 등에서 30년 이상 사진기자로 일했던 임 기자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커피를 싫어했다. 인터뷰 자리에서 커피나 차를 권하면 백이면 백 차를 고를 정도였다. 가끔 한두 잔씩 마시는 커피도 손님이니 어쩔 수 없이 마신 것뿐, 그에게 커피는 ‘쓴 물’에 불과했다.


▲임영주 전 기자가 커피 체험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임 기자 뒤로 커피농장의 커피나무들이 보인다.

그러나 2009년 우연히 방문한 케냐의 커피농장은 그에게 신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농장에서 시음한 커피 맛에 첫눈에 반한 것이다. “새로운 맛이고 새로운 세계였어요. 그 자리에서 커피 20봉을 바로 살 정도였죠. 커피 맛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신천지에 퐁당 빠졌어요.”


커피농장에 다녀온 뒤로도 그의 머리에선 커피가 떠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커피를 직접 길러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2012년 그는 힘겹게 구한 커피 씨를 아파트 베란다에 심어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말 싹이 나더라고요. 그 뒤부터는 하와이안코나, 케냐AA 등의 씨앗을 구해 계속 심기 시작했죠. 10그루가 20그루, 30그루가 되고 베란다에서 거실까지 나무들이 침범할 정도로 계속 키웠어요.”


“우연히 방문한 케냐농장, ‘쓴 물’에 불과했던 커피가 ‘언제나 함께할’ 인생 아이템으로

4년 전부터는 고향인 담양으로 큰 나무들을 데려와 50여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시험재배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농장을 차려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취미로 커피나무를 기르는 것과 하우스에서 커피나무를 기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온풍기가 고장 나 하우스가 연기로 가득 찬 적도 있고 연탄재에 알코올을 섞은 연료를 시도하는 등 정말 별 짓을 다했죠. 그때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금요일 오후에 내려와 월요일 오전에 올라가면서까지 주말을 하우스에 모두 쏟아 부었어요. 결국 그 고생을 하다 더 큰 최신식 하우스를 짓기로 결정했죠.”


▲임영주 전 기자가 올해 수확한 ‘골드 캐슬’ 햇콩.

지난해 12월 초 드디어 400평 규모의 하우스가 완공됐다. 성목과 유목 6000여 그루가 가득한 커피농장이 문을 연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농장이 위치한 금성면의 이름을 따 ‘골드 캐슬’ 커피를 생산하고 있다. 또 커피농장 투어, 로스팅, 핸드드립, 커피잼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체험장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손님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 향미전문가(MFC)와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어요. 기자 정신의 발로일지도 모르는데, 입문했으니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본격적인 카페도 생각하고 있고 지역 사회와 함께 커피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이벤트도 열고 싶어요.”


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플 정도라는 그는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식물하고 노니까 좋습니다. 기자 일이란 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데 초록 바다가 있는 농장 위를 날아다닐 땐 스트레스가 아니라 식물들에게 위로를 받으니까요. 다만 기자 생활을 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시켰기에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혹시 농부를 제2의 삶으로 생각한다면 추천할 만하다고 봐요. 큰돈은 안 될지 몰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요.”



땀에서 배운다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어
일용직 잡부로 일하는 성리현 전 기자


그의 하루는 새벽 5시50분 울리는 알람소리로 시작한다. 행여라도 허리 삐끗할까 조심조심 몸을 일으킨 후 옷을 챙겨 입고 새벽밥을 후다닥 해치우면 집을 나설 시간. 서울 교대역 부근에 위치한 사무실에 7시까지 출근하면 다시 동료들과 현장으로 투입된다. 일을 시작하는 시간은 대략 8시. 오후 5~6시에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다. 그의 직업은 일용직 잡부다.


스포츠서울에서 편집부 기자로 일했던 성리현 기자는 지난해 8월부터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소규모 인테리어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근무한 스포츠서울에서 몇 해 전 감원대상으로 올라 명예퇴직한 후 이런저런 일을 전전했지만 더 이상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 없는 퇴직에 내몰린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이죠. 언론사라는 울타리 안에선 글을 주물럭거리는 게 일이었는데 사회로 나와 보니 이 기술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쓸모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밑바닥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성리현 전 기자는 한사코 얼굴 사진이 나오는 것을 거절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막노동 하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김 집사의 권유로 막노동의 세계에 발을 디딘 그는 미장과 방수 전문이지만 철거도 하고 페인트도 칠하는 일명 ‘잡테리어’ 업체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다. 별다른 기술이 없어서다. “잡부는 대체로 힘을 많이 쓰는 일을 해요. 시멘트 포대를 부지런히 나르거나 바닥을 깨부수면 나오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마대에 담아 옮기죠. 또 청소는 물론 조수 역할도 해요. 많이 할 땐 일주일에 6일, 적을 땐 3~4일을 일하는 것 같아요.”


정신노동을 주로 하던 그가 육체노동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그는 무게 30kg 정도 되는 마대를 나르는 것도 힘들지만 공사장의 먼지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먼지가 많아서 샤워할 때 보면 코에서 시멘트 검댕이가 나올 정도예요. 그런데 늙은 인부들은 거추장스럽다고 마스크를 안 쓰죠. 그까짓 검댕 나오면 어떠냐면서 상관없이 살아가요. 상식이 없는 사회, 꿈과 희망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참 힘들죠.”


“거칠고 버거운 일이지만 그곳에서 나는 사람냄새가 이 일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

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훈훈한 인간미는 그가 막노동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다. 땀의 무게도 다르거니와 그만큼 인간적 유대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기자 시절에도 동료들과 술을 마셨지만 여기선 함께 술을 마시면 정말 동지라는 느낌이 들어요. 나와 어려운 일을 함께 하는 동지, 당신 덕분에 그래도 내가 이 길을 간다 그런 생각을 하죠. 흘리는 땀이 좀 더 진해서 그런가 봐요.”


▲성리현 전 기자가 일용직 잡부 체험을 담아 펴낸 책.

최근 그가 펴낸 ‘땀방울이 살아있네’도 결국 동료들 때문에 쓴 책이다. 막노동 하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면서도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을 기꺼이 해내는 동료 인부들의 고단한 일상, 치열한 삶의 이력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막노동판의 소소한 풍경일지라도 담고 싶었어요. 그 생각을 한 이후부턴 공사장에서 일하다 소재가 떠오르면 휴대폰 메모장에 적고 쉬는 날에 글을 썼죠. 책이 나온 후 동료 인부들에게 책을 전했는데 자기 얘기가 나왔다면서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저도 참 뿌듯했어요.”


온종일 허리 굽혀 일하느라 여기 저기 쑤시고 결리는데도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하러 가야 하는 일상. 그는 그 고된 일상을 살기에 기자들에게 막노동 일을 추천할 수 없지만 할 게 없어 해야 한다면 마음 편하게 먹고 도전해보라 권했다. “기자들은 특히 머리만 쓰는 정신노동을 주로 해왔잖아요. 이제는 몸 쓰는 일을 한 번 해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순 살에 공직생활 은퇴하고 20년 동안 공사장에 나온 사람도 있어요. 땀에서 배우기 위해. 삶의 부피를 늘려간다는 생각으로 한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비워내는 삶이 주는  행복을 전도하다 
‘심플 라이프’ 운영 탁진현 전 기자


그의 삶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엉망이었다. 2012년 이직하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일이 많아졌고 일과 상사에 대한 스트레스가 급속도로 늘었다. 그 즈음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들다고 느낀 시간이었다. 힘드니 끼니를 대강 때웠다. 건강이 나빠졌다. 일과 건강, 관계가 한꺼번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반년 가량을 운 날이 더 많을 정도로 보냈다. 그런데 그 순간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날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어수선한 방이 꼭 내 머릿속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방 베란다엔 10년 가까이 쌓아놓은 서류뭉치가 있었죠. 라면박스로 7박스에 달하는 분량이었는데 대학교 리포트부터 취재 자료까지 잔뜩 쌓아놓고 있었어요. 그 중 취재수첩을 열어봤는데 워낙 악필이라 알아보질 못하겠더라고요. 알아보지도 못할 것들을 이사 때마다 짊어지고 다녔던 거죠. 그 순간 박스들을 버리기 시작했어요. 조금 후 텅 빈 베란다를 보는데 날아갈 것 같고 해방감이 느껴졌죠.”


▲탁진현 전 기자가 집 근처인 서울 중랑구 한 커피숍의 야외정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탁진현 기자는 그렇게 비우기를 시작했다. 세계일보 계열사인 스포츠월드 등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 10여년간 일한만큼 쌓인 물건은 많았지만 주저 없이 비웠다. “집에는 책 300권을 비롯해 인기가수들이 사인해 준 200여장의 사인CD, 200벌의 옷들이 있었죠. 그 중에서 정말 필요한 것 빼고 모두 줄였어요. 옷 25벌, 책 10권만 남겼죠. 폭식하던 습관도 있었는데 패스트푸드 밀가루 화학조미료를 비워내기 위해 식단도 최소화했습니다. 직장에서도 노트북 하나만 남기고 책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요. 그렇게 비워내니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히 덜어지더라고요.”


2014년 결국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사를 그만뒀다. 직장 생활을 하며 집을 늘리는 것에 목숨을 걸었지만 물건을 비워내면서 더 이상 큰 집을 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할 땐 돈이 항상 없었어요. 소비하고 대출 갚고 저도 그렇게 살았죠. 근데 너무 괴롭게 일하고 있더라고요. 다 비우고 난 후부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회사를 그만뒀죠. 내가 찾은 행복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스트레스로 망가져가던 어느날, 쌓여 있던 짐들 내다버리며 해방감…물건·일·관계 등 삶 덜어내기 공유

그는 회사를 그만둔 직후 직접 ‘심플라이프’라는 사이트를 개설했다. 물건과 함께 집, 일, 관계, 건강, 돈 등 삶의 여러 측면을 덜어내는 방법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대학생 시절 미디어공학을 전공하며 프로그램과 디자인을 배웠던 경험을 살려 단돈 10만원에 사이트를 만든 그는 하루에 하나씩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이해를 못하는 분들도 있어 ‘심플리’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죠. 그러다 최근 미니멀라이프 열풍이 불고부터는 강연 등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건을 최소한으로 줄인 탁진현 전 기자의 방.

그는 최근의 미니멀라이프 열풍이 인테리어나 경제적 목적과 관련돼 있다고 분석했다. 복잡한 집에 지친 사람들이 아름답게 집을 꾸미고, 저성장시대에 소비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파고들면 미니멀라이프는 그 이상의 것들을 비워내는 과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거예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결국 의지가 중요하고 자기가 비우기 쉬운 것부터 비워야 하죠. 기자들이라면 책상에 서류부터 치우는 게 첫 번째 단계일 겁니다. 물론 비우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니에요. 삶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니까요. 다만 비우는 삶은 나를 착취하지 않는 방법이자 환경을 지킬 수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다른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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