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침묵…그러나 굴복은 없었다

[협회보를 통해 본 한국언론 38년]

60년대 ‘우리도 세금 내고 싶다’ 저임금 심각
70년대 ‘유신정권 탄압 절정…기자 수난시대
80년대 ‘민주화 물결 타고 5공비리 척결 활기
90년대 ‘치열한 물량경쟁 언론 상업주의 가속


기자협회가 창립한지 38년째다. 그간 1151번의 기자협회보는 한국 언론계의 관찰자로서, 감시자로서, 동반자로서 언론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64년 창간 이후부터 연대별로 기자협회보 기사를 정리하면서 한국 언론사를 되돌아본다.


“면세점 이상 급여 달라”
60년대 기자협회보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저임금이다. 기협은 연초 주요 사업으로 급료 인상을 빼놓지 않았고, 각사 급료 조사, 급료 인상 촉구 공문 발송 등은 거의 해마다 이루어졌다. 64년말 기준 무보수 언론인은 500명에 달했고, 상당수 언론인의 급료 수준이 갑근세 면세점인 8000원 미만이었던 터라 임금 정상화는 절실한 문제였다.
68년 8월 24일자 ‘우리의 주장-면세점 이상의 급료를/박봉이 사이비 기자를 만든다’는 이같은 현실의 일면을 보여준다.
열악한 근무조건 뿐만 아니라 외부의 언론탄압은 기자들의 숨통을 조여왔다. 정권은 반공법을 앞세워 언론인들을 숱하게 연행, 구속했다. 이에 대한 항의, 진상조사는 기협의 주된 업무이자 기자협회보의 단골 뉴스거리였다. 창간 직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 준비중’(조선 64.11.21) 보도로 이영희 기자가 구속되자 기자협회보는 즉각 긴급좌담을 개최해 “반공법을 언론 잡는데 써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기자 구속은 끊이지 않았다. 대한일보 대전주재 기자에 가족몰살 협박전화(65.1.15), 강원일보 기자 괴한에게 끌려나가 뒤통수를 칼로 난자당해 중상(67.1.15) 등 언론인에 대한 테러 역시 빈번했다.
특히 68년 12월 신동아의 ‘차관’ 특집기사와 관련, 5명의 기자가 연행되고 천관우 주필이 사퇴하는 사건은 언론자유를 한발 더 후퇴시켰다. 이 사건으로 최석채 신문편집인협회장은 “신문은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다”는 말을 남기고 “효과적 권익옹호에 실패했다”며 사의를 표했다.

독재의 ‘중독’에서 깨어나다
70년대 초 독재정권에 대한 언론의 침묵이 계속되자 외부에서는 규탄의 목소리가, 내부에서는 신음소리가 나왔다. 서울대생들은 동아일보 앞에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텐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언론규탄 집회를 벌였다(71.4.2). 전직중앙일보 기자는 ‘나는 이래서 와인 외판원이 되었다’(70.1.23)는 기고에서 “신문은 결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언론계의 자성 움직임은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살아났다. 언론자유수호 결의는 전국으로 확산됐고, 천관우 씨는 ‘언론자유의 새 아침에’(74.11.8)를 통해 “언론이 연탄가스 중독에서 서서히 깨기 시작했다.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정권은 동아일보에 광고 압력을 가했고, 회사는 무더기 해고를 단행한다. 관련 보도를 해오던 기자협회보도 75년 3월 7일자 증면호를 발행했다는 이유로 8개월간 폐간조치를 당했다. 이후 투쟁의 불길은 멈칫했고, 70년대 말까지 기자협회의 관심은 처우 개선으로 쏠렸다.
한편 70년대에도 저임금은 이어졌다. ‘고졸 행원 초임 5만원, 중앙지 기자 평균 2만1317원’(71.9.10) ‘언론인 63%가 생계비 이하 급료’(72.8.4) ‘갈수록 더 벌어지는 언론계와 기업체의 급료 격차’(77.10.1) 등.
기자 연행, 폭행, 테러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79년 15명의 기자들이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 취재를 하던 중 집단테러를 당한 사건은 언론계에 큰 충격을 줬다.

기자협회보 강제폐간 수난
80년대 언론계는 전후반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초반 언론계는 언론통폐합,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기본법 제정 등으로 억눌렸던 반면 후반에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조설립, 언론청문회, 5공 언론비리 척결운동 등 활기를 띠었다.
80년 기자협회보는 또 한번의 강제 폐간을 맞는다. 기협 운영위가 신군부의 언론검열에 맞서 검열거부운동을 결의하자 내린 조치였다. 81년 7월 10일 기협회보로 복간을 하지만 언론자유를 위해 제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이미 언론계는 언론통폐합, 강제해직, 언론기본법 시행(80년 12월 31일 공포) 등으로 병들어 있었다.
81년 12월 10일자 ‘기협강령 개정’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강령 2항은 그때부터 87년 9월까지 ‘우리는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여하한 압제에도 뭉쳐 싸운다’에서 ‘우리는 언론창달과 윤리제고에 앞장선다’로 대체됐다. ‘우리의 주장’ 역시 4년여간 사라졌다. 대신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령으로 취재수당에 소득세를 면세(82.1.11)해주고 언론인 금고를 통해 총 1438명에게 저리융자(84.1.12) 혜택을 주는 등 ‘당근’을내놓았다.
87년 들어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언론계는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87년 한해에만 말지 5공 정권 보도지침 폭로(87.1.16), 기협 등 언론 4단체 언론활성화 협의회 구성(5.15) 및 문공부에 언론기본법 폐지 건의(7.10), 26개사 언론수호 선언(8.10), 한국일보 노조 결성(11.10) 등 굵직한 뉴스들이 잇달았다.
80년대 말에는 ‘5공 언론청산’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88년 국정감사에서 80년 언론 통폐합에 대한 진상 규명이 시작됐으며(80.10.14), 11월 열린 언론청문회에는 언론사주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경향신문 노조의 5공 척결위 가동(88.11.18), MBC KBS 노조의 5공 특채자 축출 등 각사별로 5공 언론비리 척결운동도 확산된다. 기자협회보는 88∼89년에 걸쳐 ‘실록 1980 한국언론 구속고문해직통폐합 언론대학살 진상’ ‘전두환 체제 구축에 협조한 언론인들’ ‘5공 언론 곡필 10선’ 등의 시리즈를 통해 80년 상황을 낱낱이 고발했다.

물량 경쟁·감원 바람에 휘청
90년대 초반 언론사간 물량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일보가 주 156면 발행, 조석간 발행 등을 선도했고, 동아 조선 중앙 등은 잇달아 32, 48면 증면을 단행하는 등 경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95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은 동아 조선 중앙 한국 발행인과 만나 증면 자제를 요청하기도 한다. 증면 경쟁에 따른 언론의 상업주의 양산 우려도 이어졌다. 96년 중앙일보 지국원의 조선일보 지국원 살해사건은 빗나간 부수확장 경쟁의 씁쓸한 모습을 비춰주었다.
증면 경쟁에 내몰렸던 기자들은 90년대 중반 이후 불기 시작한 감원 열풍으로 거리에 내몰린다. 특히 97년 12월 외환위기가 언론계를 강타하면서 대규모 정리해고로 수백명의 기자들이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
언론인의 거액 금품수수설이 제기된 수서사건, ‘YS 장학생 사건’ 등은 얼룩진 언론사로 남아있다. 최근에는 윤태식 게이트, 영화 홍보비, 연예 홍보비 사건 등에 기자들이 연루돼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박주선 기자 sun@journalist.or.kr 박주선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