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잃고 애끓는 부모는 없다

엄민용 기자의 '말글 산책' <17>

   
 
  ▲ 엄민용 기자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개인사를 이유로 게으름을 좀 피웠다.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더러 짬을 내 읽어준 분들 계셨다면,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기꺼이 공간을 내준 기자협회 관계자들에게도 미안한 마음 크다.
각설하고, 얼마 전 출근길에 신문 한 부를 사서 읽다가 상쾌한 아침을 도둑맞았다.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찝찝해지는 기사 제목 때문이다.

그 기사는 익사사고로 남매를 잃고 통곡하는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밝고 맑게 자라준 아이들. 학교 성적도 좋고, 피자를 사주지 못하는 아버지와 칼국수를 맛있게 먹어주는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자식을 둘이나 잃어버린 아버지는 신문 속에서도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의 심정은 하늘이 무너진 듯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비통한 기사를 다룬 편집자는 아버지의 심정을 고작 ‘애끓는 사연’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정말 생때같은 자식을 둘이나 잃고 애만 끓이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벼락을 맞아도 싸다.

‘애끓다’는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 속이 끓는 듯하다”는 뜻의 말이다. 속상해하는 정도의 말인 것이다.
그 편집자는 ‘애끓는 사연’이 아니라 ‘애끊는 사연’이라고 표현했어야 했다. ‘애끊다’는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의미의 말이다. 여기서 ‘애’는 창자를 이른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산에 묻은 부모는 더러 잊고 살 수 있지만, 가슴에 묻은 자식은 목숨을 놓을 때까지 가슴을 후벼 판다.

편집자의 작은 실수 하나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그 아버지의 창자를 또 한번 찢어놓은 듯해 부아가 치밀기까지 했다. 다시는 이런 엄청난 망발이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빈다. 엄민용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