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일찍 가고 1분 늦게 오라'던 말씀…"전쟁 같은 현장의 버팀목 됐죠"

[기자 25시] (15)조선영상비전 이태경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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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kg 카메라 메고 매일 3~4곳서 셔터 눌러
치열한 몸싸움 다반사, 어느덧 흔들림 없이 찍게 돼

무작정 원서 넣어 인턴 시작, 프리랜서 2년 만에 정식 기자
“사진 지우세요” 요구에 감당할 부분이라 웃어넘겨

사진과 관련한 꿈 물었더니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 찍는 법이죠.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자 어깨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딱딱했다. 7~8kg의 카메라를 짊어지고 매일 취재현장 3~4곳을 누비니 어깨가 강철같이 변한 것이다. “마사지를 받으러 가면 마사지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깜짝 놀라요. 도전 의식을 불태우게 하는 어깨라나.” 그의 어깨는 딱 카메라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하다. 조금만 더 무거워지면 바로 몸이 알아채고 힘들단다. 그렇게 어깨가 카메라 무게에 익숙해지는 시간만큼 어리숙했던 그도 조금씩 강해졌다. 어느 새인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취재 현장, 그것도 치열한 몸싸움을 불사해야 하는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흔들림 없이 사진을 찍게 됐다. 올해로 9년차에 접어든 이태경 조선영상비전 기자. 지난 21일, 그의 바쁜 일상을 들여다봤다.

오전 7시30분, 조선일보 사옥 로비는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출입 카드를 찍고 속속 건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 속에는 이태경 기자도 있었다. 그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4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조출 당번이라 홀로 이른 출근을 한 탓이었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코스타리카 원두를 가는 일. 요즘 편집국에 드립 커피가 대유행이란다. “너무 여유로워 보이면 어떡하냐”며 걱정하는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데 전혀 여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원두를 가는 그 시간조차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보도자료와 참고자료, 취재일지를 챙겨보고 있었다. 원두가루로 커피를 내린 후에도 종이컵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8월21일 새벽, 8월21일 아침’ 등의 단어를 검색했다. 뉴스캐스트 속보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창문을 열어 밖도 살폈다. 전날부터 이날 아침까지 비가 내린 터라 간밤에 별다른 사건·사고는 없었는지, 현재 비가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윽고 그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략적인 보고를 하니 비 오는 출근길을 스케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카메라를 챙겨 광화문 일대를 촬영하기로 했다.

먼저 청계천 계단 앞 ‘침수위험 출입통제’ 표시 앞에서 스케치를 시작했다. 입사 이후 업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날씨 스케치는 사진기자에게 일상과도 같은 일이다. 익숙하게 사진 촬영을 마친 그는 이윽고 광화문 광장으로 넘어가자고 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뉴스1, 아시아경제의 여자 사진기자 후배들이다. “여자 사진기자들 많죠? 요즘엔 정말 많아요. 이제 여자라서 사진기자 못하는 시대는 아니에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이 기자가 입사한 2006년 초만 해도 전 언론사를 통틀어 여자 사진기자 동기는 단 3명뿐이었다. 금녀의 구역으로 일컬어지던 사진기자가 되기까지 엄청난 역경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의 입사 스토리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 지난 21일 오전 이태경 기자가 광화문 사거리에서 비 오는 출근길을 스케치하고 있다.  
 
2005년 여름방학. 교수님이 시키는 전시회 일을 피하기 위해 CBS 노컷뉴스에 인턴 지원 서류를 넣은 그는 덜컥 인턴기자에 합격했다. 사진기자를 뽑는다는 말도 없었는데 무작정 원서를 넣은 그의 ‘깡’을 높이 샀던 것일까. 취미로 사진을 찍었던 그는 그렇게 여름방학을 사진기자로 살았고 그 해 겨울방학 조선일보에서도 사진기자 인턴을 했다. 그리고 일이 ‘착착’ 붙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그는 졸업하자마자 조선일보에 프리랜서로 입사해 2년 후 정식 사진기자가 됐다. 하고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지르는’ 그의 스타일이 통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을 할 때도 거침이 없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도 광장에서도 이리저리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다. 어느 정도 스케치가 끝났을까. 곽성호 문화일보 선배와 잠시 얘기를 나누던 그가 기자를 불렀다. “선배가 커피 사주신대요.” 근처 커피전문점에 앉은 둘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카메라로 시작한 수다는 이 기자의 아이 자랑으로 넘어갔다. 곽 선배에게 딸의 애교 동영상을 보여주는 이 기자의 얼굴이 활짝 폈다. 사진기자는 매일같이 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사무실에서만 보는 회사 식구보다 오히려 타사 기자들과 더 친분이 두텁다. 중앙언론사 사진기자만 300명 정도인데 대부분 알 정도라고 한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그가 휴대폰을 만지더니 슬슬 일어나자고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도봉서원에서 출토된 불교유물을 처음으로 공개하는데 이를 촬영해야 한다고 했다. 수송차량 기사 ‘형님’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이제야 쏟아지네요. 사진 찍을 때는 안 오더니. 바닥에 저렇게 빗방울이 튈 정도는 돼야 비가 많이 오는 느낌이 나는데.” 이 기자는 인생이 그렇다고 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데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다시 구성할 수도 없는 장면들. 사진기자가 짊어져야 할 고통이자 숙명이다.

유물 공개 브리핑이 10시인데 9시40분께 도착한 이 기자는 화장실부터 들렀다. 따라가 봤더니 휴지로 빗물이 묻은 카메라를 닦고 있다. ‘무기’를 제대로 점검한 그는 잠시 유물 스케치를 한 후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브리핑이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터라 분위기는 한산했다. 그는 다양한 주문을 하며 마음껏 유물을 촬영했다. “제가 존경하는 원로 선배 중에 정범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1분만 일찍 가고 1분만 늦게 와라.” 취재 장소에 일찍 도착해 그 상황과 장소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하는 것. 그것이 이 기자의 노하우였다. 이날도 이 기자는 브리핑 전과 중간 틈틈이 충분한 양의 사진을 찍고 동영상까지 촬영했다.

다시 회사로 복귀한 이 기자가 향한 곳은 지하 식당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이었다. 이 기자는 이곳에서 오전 중 찍은 사진을 화상시스템으로 올렸다. 보통 기사 한 꼭지 당 10장 정도의 사진을 추려 간단하게 보정하고 기본정보를 적어서 올린다고 한다. 한참 작업에 열중하는 이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꽃게전쟁에 뛰어든 00마트의 꽃게를 촬영하라는 전화였다. 12시20분까지 가라는 선배의 말에 이 기자가 한숨을 쉬었다. 편집국 선배와 점심 약속을 잡아놓은 터였다. “어쩔 수 없죠. 빨리 먹고 가는 수밖에.” 마감을 채 끝마치지 못한 기자가 노트북을 덮으며 일어섰다.

   
 
  ▲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단식 농성장을 촬영하고 있는 이태경 기자.  
 
이날 점심 약속의 주인공은 박미정 편집부 기자였다. 중식당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자마자 박 기자는 “태경이가 사진을 정말 잘 찍는다”며 칭찬을 쏟아냈다. “태경이 임신했을 때를 보셨어야 해요. 임신한 채로 일하는 사진기자가 흔치 않은데 D라인을 뽐내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저 어제 통장에 돈 안 넣어드렸어요.” “지금이라도 넣어.” 칭찬을 해줘도 이런다며 아웅다웅하던 두 기자는 식사 중에도 몇 번이나 농담을 주고받았다.

선배와 점심을 먹은 후 이 기자는 마트로 향했다. 마트 입구로 가니 관계자가 이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경제면 등에 실릴 홍보 사진을 촬영하는 것도 사진기자에게 늘상 있는 일이다. 준비된 모델들이 꽃게 앞에 앉고 그가 이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꽃게를 얼굴 옆으로 들어 달라, 카메라 앞으로 내밀어 달라 등 주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마트 관계자까지 합세해 촬영을 진행하던 그가 이윽고 오케이 사인을 냈다.

마트 안 푸드코트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이 기자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전날부터 시작한 안산 시민들의 도보행렬이 오후 4시쯤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니 이를 스케치하라는 지시였다. 도보행렬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사다리가 필요하다. 타고 온 차에는 사다리가 실려 있지 않아 회사에 들러 사다리를 챙기기로 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사다리가 없다. 다 잃어버리고 이제 4개밖에 안 남았는데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나.” 낙담하던 차에 다행히 형님이 마지막 차량에 있는 사다리를 찾았다.

도보행렬을 찾기 위해 차가 출발했다. 마포대교는 이미 지났을 것 같아 공덕에서 서울역, 광화문으로 되짚어 가기로 했다. 이동 중인 차 안에서 이 기자는 도보행진 관련 기사를 검색했다. 그러나 차가 한참을 달려도 행렬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광화문 광장에서 기다리기로 하죠.” 빠르게 판단을 내린 그가 형님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광화문 광장에 가니 이미 행렬이 도착해 있었다. 본인보다 더 당황한 기자가 어떡하냐고 묻자 이 기자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빠르게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행렬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라 대표 격인 청년에게 정보를 묻고 사진을 찍는 한편 광장 주변을 스케치했다.

능숙한 그 모습에 사진 촬영에 어려운 것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 힘들다고 말했다. 우산을 받치고 사진을 찍는 것도 쉽지 않고 빗물에 장비가 망가질까봐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정신적으로 힘든 건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밀 때다. 또 조선일보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취재를 거부하고 취재 장소에서 내쫓을 때도 힘들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다리 위에 올라가 촬영을 하는 이 기자에게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조선일보 기자죠? 사진 지우세요. 조선일보 어차피 제대로 보도도 안 하잖아요.” “얼굴 나오기 싫으시면 안 내보낸다고 약속할게요. 그런데 사진을 지울 수는 없어요.”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다른 봉사자의 중재로 말다툼을 끝냈다. 자신에게 말해서 상대방의 속이 시원해진다면 백 번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는 이 기자.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에요. 일부러 모멸감을 느끼도록 심하게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는 조선일보 사진기자로서 얻는 기회만큼이나 감당해야 할 부분도 크다고 말했다.

취재를 끝마친 기자는 4시30분께 사무실로 향했다. 광화문 광장 스케치 사진까지 화상시스템에 올린 그는 사무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선후배들과 수다를 떨고 간식을 먹었다. 5시가 넘어가면 사진기자는 한가해진다. 지면 마감 시간이라 조판 작업 중인 면들을 확인하고 그날 찍은 사진 중 어떤 것이 지면에 실렸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이날은 오전에 찍은 불교유물 사진이 10면 사회면에 실렸다.

그에게 5시에 일이 터지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가면 되는 거죠”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 그는 이르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노력해요. 그래도 아직 잘 안 됩니다.” 그도 한때는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80kg까지 불어난 적이 있었다. 이후 걷기, 자전거, 요가를 통해 약 20kg을 뺐지만 스트레스 해소법을 계속 개발하는 중이라고 했다. 요즘에는 수영과 함께 25~30분 정도 걸리는 출·퇴근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그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꿈이 무엇인지도 물어봤다. 다양하다. 딸과 함께 세계여행을 하는 것, 그리고 감히 ‘사진의 신’은 못되더라도 ‘수영의 신’이 되는 것이다. 사진과 관련한 꿈도 알려달라고 졸랐더니 뜬금없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진에도 찍는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단다.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어요. 그래서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루종일 피곤했을 법도 한 그의 눈이 꿈을 말하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만큼이나 반짝 빛났다. 강아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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