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명(軍艦名)에 담긴 동북아의 상처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차장·정치부


   
 
  ▲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동북아 바다가 또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열강의 해군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구한말을 연상시킨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거침없이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일본과 경제굴기에 이어 군사굴기를 노리는 중국, 옛 소련의 영광을 못잊는 러시아, 그리고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를 외치는 미국이 틈만 나면 우리의 주변 해역에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동북아 강대국의 최신 군함 이름에서 구한말 제국주의 시대의 자취가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지난 5월 중·러 양국이 동중국해상에서 벌인 합동군사훈련 ‘해상협력-2014’에는 러시아의 최신 미사일 순양함인 바랴크호와 대잠 초계함 카레예츠호 등이 참가했다. 이들 군함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여했던 순양함과 포함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두 군함 모두 제물포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타고 있던 러시아 장병들은 일본의 항복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스스로 자폭해 수장되는 길을 택했다.

러시아는 이들 장병의 장렬한 투혼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구소련 때부터 역사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 사건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바랴크호를 기념하는 노래가 8개나 된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노량해전과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방한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짧은 체류 일정 속에서도 인천항에 설치된 바랴크함 추모비로 달려간 것은 이런 국민정서를 의식한 행보였던 셈이다.

바랴크라는 이름은 13억 중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구소련이 바랴크호의 이름을 기려 만든 항공모함 바랴크를 사들여 다롄조선소에서 10년 동안 손질한 끝에 2012년 9월 중국의 첫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호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중국도 러시아 바랴크호와 비슷한 패배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중국 정부는 최근 1894년 청일전쟁때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침몰됐던 북양함대의 철갑순양함 ‘즈위안(致遠)’함을 국민 성금으로 복원해 오는 9월부터 역사 교육용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 순양함은 덩스창(鄧世昌) 함장을 비롯한 장병 240여 명이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해군은 청일전쟁 120주년이었던 지난 25일 북양함대 기지였던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시 류궁다오(劉公島)에서 ‘갑오의 치욕을 가슴 속에 새기고, 강군의 꿈을 실천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식을 가졌다.

반면 일본은 옛 군국주의 시대의 승전을 기억하는 도구로 군함 명칭을 활용하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지난해 8월 항공모함급 헬기 호위함 ‘이즈모(出雲)’호를 진수했다. 일본은 시마네현 동부의 옛 명칭을 따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중국과 러시아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호위함의 이름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받은 막대한 배상금으로 만들었던 길이 132m, 폭 21m의 장갑 순양함의 명칭과 똑같다. 순양함 이즈모는 러일전쟁 당시 제정 러시아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던 쓰시마 해전에서 활약했고,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상하이 앞바다에서 시내를 향해 집중 포격을 가해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바 있다.

군함 이름을 통해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우리 해군도 마찬가지다. 지난 3일 1800톤급의 국내 최대 디젤 잠수함인 윤봉길함이 진수식을 가졌다. 최고 속력 20노트(37㎞)로 하와이까지 연료 재충전 없이 왕복 항해할 수 있고 수면에 올라오지 않고 2주간 수중에서 작전수행이 가능해 디젤 잠수함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해군은 2008년 6월 진수된 ‘안중근함’부터 신형 잠수함에 줄줄이 항일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앞으로 나올 잠수함들도 홍범도, 김구, 안창호, 유관순, 이봉창 등의 이름을 붙힐 계획이다.

동북아 각국의 군함 이름만 보면 역사의 시계바늘이 이미 100여년 전으로 되돌아간 착각이 들기 쉽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 비극만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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