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그 잊혀가는 기억을 기록하다

'잊지 않겠습니다' 연재 한겨레 김기성·김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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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읽다가, 통화하다가 복받치는 눈물 삼키며 원고 채워
가슴에 자식 묻은 부모의 바람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세월호 특별법 하루빨리 통과돼 아이들 한 풀리는 게 소망




   
 
 

▲ 김기성 기자


 
 

   
 
 

▲ 김일우 기자


 
 
울음이 복받쳤다.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받을 때. 흐느끼던 부모가 엉엉 울어버릴 때. 200자 원고지 3매 분량의 짧은 기사를 쓸 때. 세월호 참사 두달째인 6월16일부터 지금까지 한 달 반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한겨레 1면에 ‘잊지 않겠습니다’란 제목의 ‘만인보’를 연재하는 김기성·김일우 기자. 다 큰 남자가 우는 게 남우세스러워 기침하는 척, 하품하는 척 하며 눈물을 흘리면 동료 기자들은 말한다. “괜찮아. 울어도 돼. 울어도 되는 일이야.”

두 기자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대구 주재기자임에도 40일 넘게 안산 여관에서 먹고 자며 취재를 한 김일우 기자와 사고 당일부터 66일간 안산에 머물렀던 김기성 기자는 가족들 속으로 들어가야 그들의 얘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의 바르게 취재하려 노력했다. 무리하게 멘트를 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울며 유가족의 얘기를 들었다.

기획은 박재동 화백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세월호 참사 한 달째인 5월16일 박 화백이 그때까지 그린 학생들의 캐리커처를 신문에 싣자고 했다. 그러나 부모들의 초상권 동의를 받는 과정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편집국 내부에서도 한 번 실어서 뭐하느냐, 조금 더 고민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 두 달째를 며칠 앞뒀을 때 김이택 편집국장과 이종규 사회2부장이 학생들의 얘기를 한 명 한 명 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쉽지 않은 기획이었으나 일은 뜻하지 않게 풀렸다. 6월 중순 박 화백과 김 국장이 표구한 10명의 액자를 들고 유가족대책위원회 사무실을 찾았다. 캐리커처를 유가족 대표에게 전달하고 조문만 하고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유가족 대표가 대뜸 경기도미술관 강당에서 열리는 유가족대책위에서 직접 캐리커처를 전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얼떨결에 김 국장은 강단에 서서 기획 의도를 설명하고 부모들에게 직접 캐리커처를 전달했다. 상처를 덧내려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으려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부모들은 그 이후 한겨레에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안산에서 취재를 했던 두 기자가 자연스럽게 연재를 맡게 됐다.



   
 
  ▲ 한겨레는 지난 6월16일부터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 부모의 편지를 1면에 싣고 있다. 소개된 편지는 한데 모아 온라인 특집페이지에 모아두고 있다.  
 
부모들이 편지를 보내오는 방식은 다양했다. 직접 부치기도 하고 인편에 전달하기도 했다. 세월호 특별법 농성장에 있는 부모는 카카오톡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 메일로 전송하는 부모도 있었다. 방식은 다양했으나 그 안에 적힌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꿈이라는 단어는 공통적으로 나왔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제발 꿈에라도 나오길. 자신의 편지가 신문에 실림으로써 아이가 한 번이라도 더 꿈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바람이 편지에 가득 담겨 있었다. 두 기자는 이 편지를 섣불리 고칠 수 없었다. 맞춤법 정도만 교정해 날 것 그대로 실었다. 편지가 길면 지면에는 일부만 내고 온라인에 전문을 실었다.

편지가 오면 김기성·김일우 기자는 부모에게 연락을 했다. 학생 이야기를 직접 듣고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하루 3~5명의 부모와 연락을 취했다. 기자와 통화를 하는 부모는 항상 울었다. 우리 아이는요, 밝게 이야기를 시작하다가도 부모의 말에는 금세 물기가 배어 나왔다. 아빠가 말하다가 울고 바꿔준 엄마가 또 울고 그래서 다시 바꿔준 대학생 언니마저 울어서 결국 문자로 취재를 한 적도 있었다. 자정이 다 될 무렵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우리 아이의 이런 얘기도 넣어달라는 전화였다. 김기성 기자는 이 취재를 막연하게 시작해서 답답하게 끝나는 취재라고 했다. 단순한 취재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절박한 기록이었다.

‘1993년 전북 부안군 여객선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292명 사망’,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502명 사망’,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192명 사망’. 김일우 기자는 사람들이 이 사고의 희생자 이름 하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죽음이 숫자로만 기록돼 나열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연재 기사를 준비하며 개개인의 억울한 죽음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늘 유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들의 눈물을 1%도 채 기사에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다.

두 기자는 부모들의 편지가 끊어지는 날까지 이 기사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적어도 희생자 중 절반은 기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거의 2년 가까이 진행되는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이 연재 기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결실을 보기 바란다.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돼 아이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이 두 기자의 소망이다. 강아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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