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대통령' 오바마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12세 소년 닉키 더팔은 2011년 10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에서 오바마를 독대했다. 닉키가 그의 엄마인 낸시 앤 더팔 대통령 비서실 부실장에게 ‘백악관 일을 그만두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한 뒤였다.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법인 ‘오바마케어’를 입안하는 일을 담당하느라 바빠서 아들과 제대로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늘 미안해했던 엄마는 아들의 말에 미련없이 오바마에게 사직 의사를 표했다.

오바마는 닉키를 백악관에 불러 함께 어린이 막대과자를 먹으며 ‘너도 엄마가 필요하겠지만 나도 너희 엄마가 좀 더 필요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없느냐’고 설득했다. 낸시 앤 더팔은 2013년 1월까지 백악관 근무를 한 뒤 퇴직했고, 늦었지만 아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백악관 참모들도 육아 문제가 큰 고민거리인 것 같다. 제이 카니 전 백악관 대변인은 딸의 학교 행사에 학부모로 참석해야 해서 정례브리핑을 하지 못하고 갑자기 ‘대타’를 내세워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할 때가 있다.

오바마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참모였던 서맨사 파워 주유엔대사는 자신의 네 살 난 아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사연이 뉴욕타임스에 소개됐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통화할 때도 아이를 신경 써야 할 때가 있고, 다른 나라의 동료 유엔대사들과의 만찬 자리에서도 아이 문제로 갑자기 자리를 뜨는 경우도 있었다.

백악관 참모들도 다른 모든 보통의 미국인들처럼 부모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오바마는 육아 문제로 인한 직원들의 고충을 이해하며 필요할 경우 근무 시간과 장소를 탄력적으로 조정하도록 권장하는 좋은 ‘사장’이었다. 오바마 역시 대통령이기 이전에 학교 다니는 딸을 둔 아빠다.

오바마는 6월23일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일하는 가족 정상회의(Working Families Summit)’ 연설에서 자신의 두 딸이 태어났을 때 출산휴가를 받을 수 있어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사연을 소개했다.
새벽에 깨서 우는 아이를 위해 기저귀를 갈고 트림을 시키고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었던 것은 낮에 근무를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많은 부모들이 자신처럼 운이 좋지 않다는 점을 잘 안다며 유급 출산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지 않은 현실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제를 정책적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느냐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학부모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은 자신들의 고충에 비춰 적어도 미국의 보통 엄마, 아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공감하고는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청와대나 한국의 정부부처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육아 얘기를 함부로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일반 기업체도 마찬가지다. 학부모 행사에 가기 위해 근무를 탄력적으로 조정하기는커녕 집안에 큰 일이 있어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양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가 미덕으로 통용된다.

미국 어린이 채널의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김없이 아빠, 엄마, 그리고 아이들이다. 그것이 편부모이건 양부모이건 아이와 부모가 함께 하는 에피소드가 많다. 반면 ‘뽀로로’ 같은 한국의 어린이 만화는 부모가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 만화는 좋게 말해 어릴 때부터 사회성을 키우는 것을 권장한다. 부모 없이 아이들끼리 알아서 잘 노는 설정이다. 그것은 아이들과 놀아줄 수 없는 부모의 처지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정당화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드라마에는 성인이 된 이후 부모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자녀의 결혼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결혼 이후에는 고부갈등 등 자녀와 부모 사이의 갈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아이들이 부모를 정말 필요로 하는 시간은 길지 않다. 어느 시점이 되면 부모를 찾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한국의 부모는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는 존재하지 않다가 별로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다시 등장해 ‘내가 너의 부모다’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 너무 많은 부모들이 이미 때는 늦었다는 점을 알게 되지만 현실은 잘 바뀌지 않는다.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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