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21 '각본대로 선발전'

제285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방송 / SBS 이한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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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BS 이한석 기자  
 
승부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승자는 태극마크를 달고 국민적 영웅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지만 패자는 다시 처음부터 고된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수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를 놓고 심판의 판정은 매우 공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권도계의 승부는 여전히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의 비호를 받는 선수에겐 결승전에서 경기를 치르지도 않고 기권승을 따내는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권력에 덜 가까이 있는 선수들은 실력으로 결승에 진출해도 금메달은 목에 걸 수 없었습니다. 도덕불감증은 여전히 태권도계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퇴한) 태권도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대한태권도협회 K임원에게 물었습니다. 선수들에게 왜 기권을 강요했는지…. K임원은 자신은 유능한 선수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대한태권도협회의 임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선수들이 경기에서 부상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기권을 지시했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도 했습니다.

그런데 K임원이 말하는 유능한 선수들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을 걱정했다면 왜 진작부터 선수들의 출전을 막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유독 태권도계에서 K임원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이 있는 선수들이 출전하는 체급에서만 이 같은 기권사태가 벌어졌던 것일까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왜 당시 대회 경기운영을 책임지는 운영위원장은 ‘승부조작’이라며 기권시킬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했던 것일까요? K임원은 이 같은 무수한 의혹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K임원은 자신이 과거 한 실업팀 감독시절 경험을 들려주며 각박한 현 세상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친분이 있는 다른 실업팀 또는 대학 감독이 부탁을 하면 자신은 선수들에게 져주라고 얘기도 했고 기권도 지시했다고 말했습니다. 기권과 우승을 양보하는 건 승부조작이 아니라 상부상조의 미덕이라는 게 K임원의 논리였습니다.

이건 누가봐도 명백한 궤변입니다. 상부상조하는 미덕이 살아 숨 쉬는 태권도 협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국가대표 선발전을 굳이 치르며 판정시비 논란을 감수할 게 아니라 아예 실업팀, 대학팀 순번대로 사이좋게 세계대회에 출전자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K임원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태권도계의 판정도 공정함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심판위원회의 고유권한인 심판배정에도 개입했고 협회 정관에서 규정한 절차를 무시한 채 특정인물들에 대한 징계를 감면해주기도, 무자격자를 협회 임원에 앉히기도 했습니다. 막강한 협회 임원의 권력 앞에 대한태권도협회는 어느새 특정인을 위해 사유화됐던 것입니다.

방송이 나간 이후 이 같은 협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목소리는 더욱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체육계의 구조적인 비리는 비단 태권도와 쇼트트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얼마전 대한체조협회 한 임원의 사퇴도 이 같은 비리 의혹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잊혀질만하면 이곳저곳에서 체육계 비리의혹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체육계가 몸을 사릴 법도 합니다만 자숙의 분위기도 오래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들만의 세계는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법은 결국 여론입니다.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높은 도덕성과 체육계의 개혁을 염원하는 국민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입니다. SBS 이한석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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