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레슬러의 의리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차장·정치부


   
 
  ▲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북한과 일본이 일본인 납치자 문제의 전면조사에 합의하면서 북·일 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북·일 양측은 지난달 26~2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국장급 협의를 열어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전면 재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또 조사가 개시되는 시점에 일본이 취하고 있는 독자적 대북제재를 풀기로 했다.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면 국교 정상화 협상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한국과 미국으로서는 북핵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이 지나치게 북한 페이스에 말리는 것은 아닌지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프로레슬링 영웅 안토니오 이노키(71)가 북·일 대화에 다리를 놓았다는 점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그동안 자신의 측근을 활용해 몇차례 북한과의 대화를 타진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주요한 고비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등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면서 대화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꽉막힌 상황에 구멍을 뚫은 것이 이노키다. 그는 올 1월초 방북 일정을 마친 뒤 귀국하면서 “김영일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이 후루야 납치문제 담당상의 방북을 요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아베 정권은 당초 정부 차원의 공식 제안이 아니라며 일축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물밑에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일본 외무성은 1월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한 당국과 비밀 접촉을 시작해 4개월만에 스톡홀롬 합의까지 도출할 수 있었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신화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대표적인 친북인사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까지 총 29번 방북해 북한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2010년에는 북한으로부터 ‘제1급 친선훈장’까지 받았다. 국회의원이기도 한 그는 북·일 관계가 경색된 지난해 11월 의회의 불허 방침에도 방북을 강행해 등원 정지 30일의 징계까지 받았을 정도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존경하는 영웅이 왜 하필 북한에 못가 안달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이노키의 정치적 이념은 극우보수에 가깝다. 지난해 참의원선거에서 위안부 망언으로 유명한 하시모토 도루가 이끄는 일본유신회의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됐다. 최근에는 ‘원조극우’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주도하는 극우 신당에 참가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따라서 그의 친북활동은 정치 이념만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이노키 자신은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스승인 역도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함경남도 출신의 역도산은 생전에 북한 정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62년 김일성에게 50세 생일 축하 선물로 벤츠 승용차를 보내는 등 북한에 상당한 기부를 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자신의 친족들을 지키려는 보호본능에서였다. 덕분에 그는 가장 자본주의적 스포츠중 하나인 프로레슬링 선수지만 북한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생애를 담은 소설과 TV드라마, 영화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노키는 역도산에 대해 신앙에 가까운 존경심을 갖고 있다. 역도산은 1960년 남미 순회 경기를 하던 중 일본계 이민자 가운데 유난히 체격이 큰 소년을 발견해 일본으로 데려와 선수로 데뷔시켰다. 그가 바로 이노키다. 이노키는 요즘도 “스승이 안 계셨으면 지금 내 자신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이노키는 역도산이 40세 나이에 급사하자 그를 대신해 북한을 드나들며 스승의 피붙이들을 챙겼다. 그의 지속적인 후원 때문에 역도산의 사위 박명철과 여동생 2명은 북한에서 유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일본의 무혼(武魂)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에 가능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본 사회에서 매장됐을 지 모른다. 역도산의 제자이자 한국 레슬링의 영웅인 김일 선생이 말년에 생활고를 겪으며 어렵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잊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도 이노키였다. 190㎝, 115㎏의 늙은 레슬러가 민족도 이념도 경제논리도 초월해 진짜 ‘의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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