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마나 한 말은 하지 말라…그게 편집의 ABC"

[기자25시] (6)아시아경제 이상국 편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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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6일 아시아경제 편집국 회의실에서 이상국 편집에디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새벽 출근…젖은 솜처럼 몸은 무겁지만 책상에 앉으면 기운이 펄펄
강판 다가오는데…기사는 안 들어오고, 다급한 마음에 탄식소리만
과감한 여백·강렬한 붉은 색…아시아경제만의 특별한 시도


취재기자가 기사를 쓴다면, 독자가 그 기사를 읽도록 만드는 것은 편집기자의 몫이다. 창의력과 순발력으로 기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편집기자. 이들 가운데 이상국 편집에디터가 있다. 매일경제, 조선일보, 중앙일보, 일간스포츠 등을 거쳐 아시아경제에서 25년여의 편집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편집이 언론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아경 편집부는 지난해 ‘이달의 편집상’을 10회 연속 수상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하루를 들여다봤다.

이른 새벽, 이른 시작
2월6일 아침 6시30분. 새벽 어스름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 충무로 한 건물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이상국 아시아경제 편집에디터가 있다. 석간신문 편집기자로 3년째.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새벽녘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발걸음은 늘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그러나 편집국에 들어서면 이내 활기를 되찾는 그다. 이 에디터가 이끄는 팀은 편집2팀. 20여명의 편집기자들이 아경만의 지면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공간이다.

이 에디터를 비롯한 편집기자들이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조간신문을 살펴보는 일이다. 이른 출근에 아침을 챙겨먹지 못한 기자들은 회사에서 나눠주는 샌드위치와 김밥, 우유로 빈속을 달래며 모니터를 훑는다. 후배들을 혹독하게 교육시키기로 유명한 이 에디터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타 매체 비교·분석이다. 기사 내용을 읽는 것보다 편집자적 안목에서 신문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 이런 제목을 달았나. 왜 이 기사는 여기에 배치됐나’ 끊임없이 고민하고 논의하는 것이 편집기자가 돼 가는 과정이다.

이 에디터는 ‘뉴스모니터’를 켠다. 뉴스모니터를 통해 편집기자들의 작업 상황을 살필 수 있다. 몇몇 지면들은 이미 완성 상태다.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간지는 전날 오후에 미리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시의성을 띤 앞쪽 지면과 달리 간지는 기획보도로 채워지기 때문에 앞선 작업이 가능하다.

아침 7시30분. 중학교 교실에서 들어봤을 법한 종소리가 울리자 각 부 데스크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편집회의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회의실은 박종인 편집국장을 필두로 들어선 부장들로 이내 가득 채워졌다. 편집부에서는 이 에디터와 주요면 편집을 담당하는 기자들이 참여한다.

현재 1~3면은 최승희, 김현희, 권수연 기자가 각각 맡고 있다. 간지의 경우 담당자들이 수시로 바뀌지만 주요 지면은 그렇지 않다. 이 에디터는 “일종의 개각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분방하고 활발한 사회면, 준엄한 정치면, 전문적인 정책면 등 면별 컨셉트도 담당 기자와 어우러져야 한다.

편집회의가 시작되자 긴장감이 조성됐다. 부장들은 조간신문 및 주요 이슈 정리, 발제, 정보보고 등을 한다. 사회·문화, 정치·경제, 금융, 국제, 증권, 산업, 건설부동산, 골프 등 부서만 10여개. 이들이 낸 수십 개의 발제 중 어떤 기사가 1면에 배치되고 어떤 헤드라인이 달릴지, 까마득해보였다. 그러나 수십 년간 ‘신문 밥’을 먹은 기자들은 이러한 고민이 일상. 서로 몇 마디를 주고 받으며 논의를 이어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주요면 기사 배치를 끝냈다. “4면엔 뭐 들어가요? 이산가족 들어가도 되겠는데.” 이 에디터가 노트에 부지런히 기사 제목을 메모하며 여유 있게 회의를 마친다.



   
 
  ▲ 편집부 벽면은 아시아경제의 독특한 지면들로 채워져 있다.  
 
회의가 끝나자 시계가 8시10분을 가리켰다. 이 에디터는 “오늘은 정말 일찍 끝난 편”이라고 했다. 논쟁적인 사안이 있을 땐 고성이 오고 가기도 하고, 회의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어서기도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힘 있는 ‘헤드라인’을 위해
11시 강판까지는 3 시간여가 남았다. 출고되지 않은 기사가 수두룩하다. 지면은 뻥뻥 뚫려 있다. 편집회의에서 주요 면에 배치된 기사들도 언제 빠질지, 언제 또 새로운 기사들이 들어올지 예측할 수 없다. 분초를 다투는 것은 취재기자도 마찬가지겠지만 편집기자 또한 제작 일선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순발력을 지녀야 한다.

기자들의 손놀림은 빨라지고 편집국에도 이내 말소리가 돌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출근해 조간을 살펴보던 고요한 분위기는 간 데 없다. 이 에디터는 자리에 앉더니 책장에서 잉크를 꺼내 열었다. 만년필에 채워 넣기 위해서다. “저는 만년필만 써요. 습관이 돼서…. 제목도 만년필로 써야 나와요(웃음).”

편집기자들이 완성된 지면을 출력해 이 에디터에게 내밀었다. 그는 만년필로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더니 후배기자들이 만든 헤드라인을 가차 없이 수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in섹션’은 이 에디터가 유달리 공을 들이는 부분이다. 화려한 비주얼보다 살아 움직이는 헤드라인이 간지의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손길로 헤드라인은 더 간결하고 임팩트 있게 변신한다. 유머와 발상의 전환도 필수다.

반면 스트레이트 기사는 핵심을 최대한 살리는 게 중요하다. 이 에디터는 기사가 지닌 ‘톤앤매너(tone & manner)’에 집중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를 재가공하는 기사의 경우 좀 더 독특한 제목을 달지만 새로운 정보는 그 자체가 신상품이기 때문에 가공도를 높일 필요가 없다. 이 에디터는 “사람들은 제가 튀는 제목만 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필요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다”며 “그걸 잘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에디터는 후배들에게 “뻔한 말은 하지 말라”고 수시로 주문한다.

“박근혜 ‘이산가족 상봉 늦게나마 다행’? 이건 하나 마나 한 말인데. 관련 기사도 있고…. 1면에서 빼자.”
“담배 판매 중단한 이유는? 당연히 금연 캠페인 앞장이겠지. 그냥 ‘담배 판매 중단 선언’ 스트레이트로 가자.”

제목만 봐도 기사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편집기자의 중요한 덕목. 이 에디터가 2면을 편집하던 기자에게 수정을 요구한다. “8학군은 8개 학군이 아니잖아. 4학군이 아니라 ‘4개 학군’이라고. 기사 내용에 맞게, 오해의 소지 없게.”



   
 
  ▲ 강판을 마친 오후, 다음날 지면을 편집하고 있는 후배기자를 지켜보는 이상국 편집에디터.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군비확장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는 주제의 5면 기사 제목도 문제였다. “미국하고 중국은 경쟁 자체가 안 되는데 왜 비교를 했어? ‘국방비 지출, 한국 11위 일본 7위’ 바로 올려.”

10시가 넘어가자 이 에디터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다. “지면이 왜 이렇게 비어 있지? 갈 사람은 빨리 가야 된다!” 그가 기자들을 독촉한다. 마음이 급해질 법도 한데, 편집팀원들은 늘 익숙한 일인 듯 침착하게 각자의 일에 집중한다.

10시38분. 강판이 가까워오자 데스크들이 파란색 종이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어떤 면에 무슨 사진을 쓸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 에디터가 다시 한 번 외친다. “자, 이제 갈 시간인데 왜 아무도 안 가? ‘사람향기(26면)’는 텅텅 비었네!”

시간이 다가오자 손으로 직접 써서 수정해주던 이 에디터가 제목을 읊기 시작한다. “권수연 (차장) 어디 갔어! 3면 제목 ‘애플 압박하라, 진격의 3각편대’”

기자들이 바쁘게 헤드라인을 수정하고 사진을 넣고, 출고된 기사를 편집하는 사이. 벌써 시계는 11시를 넘겼다. “아유…” 시종일관 침착하게 후배들을 지휘하던 이 에디터가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는다. 이윽고 한 부장이 다가와 박근혜 업무보고 풀 기사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비보를 전했다. 이 에디터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4면에 5단 광고 없어? 아무거나 하나 받아. 박근혜 업무보고 빼고 빨리 마쳐!”
그의 탄식이 두세 차례 더 지나가자 6일 석간신문 편집이 드디어 끝났다. 11시20분. 이른 시간이지만 강판을 마치면 기자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1시간 후, 점심을 먹고 돌아오면 인쇄된 신문이 사무실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여유 있는 오후, ‘편집’을 말하다

숨 가빴던 편집국을 빠져나가며 한결 여유를 되찾은 이 에디터가 덧붙였다. “예나 지금이나 편집은 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해요. 기사 출고부터 강판까지 한 시간이니까요.”

이날 점심식사는 편집국장, 부장들과 함께였다. 박종인 편집국장은 이 에디터에 대해 “고전에도 조예가 깊고 한문을 굉장히 잘 한다. 신선하고 새로운 사자성어를 만들기도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에디터의 한문 실력은 지면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해 12월30일 송년호 ‘4자성어로 풀어본 아경 10대 뉴스’는 그의 작품이다. 서민들이 겪은 전세 대란은 ‘황당함세(荒唐含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린 갑을 논란은 ‘갑농을박(甲弄乙駁)’, 북한 장성택 숙청은 ‘팽고모부(烹姑母夫)’ 등으로 표현했다.

이 에디터는 문학가이기도 하다. 필명은 ‘빈섬’. ‘옛사람들의 걷기’, ‘나는 조선의 총구다’ 등 저서가 8권 가량 된다. 2011년 아경에 들어오기 직전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지난해에는 오피니언면 ‘아, 저詩’라는 코너를 통해 직접 시를 쓰기도 했고, 올해부터는 26면 ‘사람향기’에 ‘천일야화(千日野話)’라는 스토리텔링을 연재 중이다. “재미없어서 아무도 안 읽는 것 같다”며 자조 섞인 평을 늘어놓지만, 그의 작품은 한눈에 봐도 문학적 깊이가 수준급이다.

이러한 감수성이 편집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 에디터는 “그런 부분도 있지만, 20년 이상 편집을 하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게 가장 큰 자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 에디터는 네이버 카페 ‘편집, 그 이상의 편집’을 후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공간을 통해 아경 편집기자들은 뼈아픈 자아성찰의 기회를 갖는다. 그는 “후배들을 무섭게 비판하는 편”이라며 “좋은 상사는 아니다”라고 웃어보였다. 그러나 아경 편집부가 지난해에만 10차례 ‘이달의 편집상’을 휩쓸며 신문계의 백조로 우뚝 선 것은 모두 수면 아래 발장구 덕분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12시30분. 이 에디터는 완성된 지면을 한 차례 살펴본다. 군데군데 아쉬움도 남는다. 편집부원들은 이미 다음날 실릴 간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에디터도 휴식을 취한 후 편집국으로 돌아오면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다음날 지면에 게재될 ‘천일야화’를 쓰는 것이다. 블로그 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는 현재 편집과 시 등 그의 관심사로 가득 찬 ‘빈섬’이라는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누적 방문자 수만 160만여명, 그의 블로그를 구독 중인 누리꾼은 1000여명에 달한다.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던 이 에디터에게 편집의 비전을 물었다. 그는 “편집의 중요한 감각은 디자인”이라고 했다. 독자들은 신문에 담긴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어떻게 디자인했는지를 사 본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만큼 아경은 새로운 시도를 자주 감행한다. 과감한 여백과 강렬한 붉은 색, 인물의 얼굴을 전면에 배치하는 전략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아경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애독자들도 전보다 자주 만난다.

“이런 시도를 메이저 언론에서 한다면? 굉장히 어렵죠. 아마 신문이 망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경은 제호를 지면 아래로 내리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죠. 우리가 경박하기 때문일까요? 독자에게 예측불허의 재미를 주기 위한 겁니다.”

오후 5시. 편집회의가 다시 소집됐다. 다음날 석간에 실릴 뉴스거리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오전 회의에 비해 이 에디터의 수첩이 깨끗하다. 이슈가 수시로 바뀌는 탓에 전날 회의에서는 지면 배치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경 편집부의 하루 일과가 지나갔다.

이 에디터는 “아경을 기동력과 전략이 강한 신문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지난 1월 말 ‘ON-OFF 편집에디터’로 발령된 만큼 ‘온라인 판’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고 예고했다.

“나이가 많다보니 제가 가진 재능, 역량을 빨리 써야하는 상황입니다. 후배를 위해서도, 언론을 위해서도 그렇죠. ‘신문 밥’ 먹은 세월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놓겠습니다.” 김희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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