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영하 15도, 곱은 손 후후 불며 찍고 또 찍었다

[기자 25시] (2) YTN 김현미 카메라기자

  • 페이스북
  • 트위치


   
 
   
 
‘좋은 영상’ 위해서라면…
자리확보 위해 동료들과 몸싸움도 불사

‘여자인데’ 주위 시선엔…
날카롭게 반응했었지만 이젠 웃음으로 넘겨

‘역사 기록’ 무한한 보람…
평생 현장에서 숨 쉬는 영원한 기자로 남고 싶어


“어머, 여자한테 왜 이렇게 무거운 걸 들게 해?!”
길을 가는 한 시민이 그의 옆에 있던 오디오맨을 타박한다. 그가 어깨 위에 메고 있던 10kg 짜리 카메라가 문제였다. 예전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 날을 세우고 싸웠겠지만 이젠 도가 텄다.
“이 분이 든 삼각대가 더 무거워요. 호호.”
올해로 7년차를 맞은 김현미 카메라기자가 여유 있게 응수한다. 그는 어딜 가나 주목받는,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의 ‘홍일점’이다.

나는 ‘여자’ 카메라기자다
“여자인데, 할 수 있겠어요? 술은 잘 마시나?”
“세 병쯤 먹죠?”
“아… 네, 네, 그 정도 먹습니다…”

그가 ‘여성’ 기자라는 것을 실감한 건 면접에서다. 면접관들은 ‘여자가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할 땐 이 업계에 이토록 여자가 적은 줄 미처 알지 못했다.

현재 지상파 방송사를 모두 통틀어 여성 카메라기자는 서너명 남짓. YTN 소속 70여명의 카메라기자 중에서도 여성은 김 기자가 유일하다. 선배들은 김 기자가 입사하기 전, 여성 카메라기자들의 맏언니 격인 MBC 오령 기자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우리 부서에 여기자가 한 명 들어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다. 입사 직후 오 기자와 면담도 했다. 기자사회에서도 방송촬영 분야는 ‘금녀의 영역’으로 일컬어질 정도다.

영상취재팀의 분위기는 좀 더 화사해졌지만 그의 고민은 갈수록 늘었다. 롤모델로 삼을만한, 고민을 털어놓을만한 선배가 없었다. 남자 선배들은 ‘징징 댄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느 취재현장에 가도 워낙 튀다보니 구설수에도 자주 올랐다. “너네 회사에 그 여자 후배 있잖아…” 타사 카메라기자의 이 한마디로 선배 기자들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했다.



   
 
   
 
모든 게 스트레스였다. 2008년 입사 후 그가 내던져진 현장은 ‘촛불집회’였다. 이틀에 한 번 꼴인 야근, 거친 시위 현장… 신체적 한계에 달했다. 카메라를 들고 올라간 사다리 위에서는 졸음이 쏟아졌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은 지나던 행인이 말을 걸었다. “저기요, 바지에…” 집회 현장을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느라 그날 ‘마법’에 걸린 줄도 몰랐던 거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다. 치렁치렁한 선배 바지를 빌려 입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여자’라는 걸,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카메라 ‘기자’다
그가 거칠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좋은 구도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싸움’에 있어서는 절대 지지 않았다. 몸싸움도, 욕설도 마다하지 않았다.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소리 높여 맞섰다.

“카메라가 무겁지 않느냐”, “여자인데 힘들지 않냐”는 주변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무조건 싸웠다. 일부러 살도 뺐다. ‘카메라기자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야할 것’이라는 편견을 무너뜨리고 싶어서다. 이건 ‘기자’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촛불집회 초기 시민들은 YTN 보도에 싸늘한 시선을 보였다. 현장 분위기도 살벌했다. 한 집회참가자는 그에게 “닭장차(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라. 위에서 경찰들부터 찍어라. 그러면 YTN 너희들 인정해주겠다”고 쏘아붙였다. 이를 꽉 문 그가 경찰 버스 위로 올라가자 이를 저지하려던 경찰들이 소화기를 쏘기 시작했다. 카메라도, 그도 하얀 분말에 뒤덮여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태가 터졌을 때도 그는 현장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데스크는 숙소나 날씨 문제를 거론하며 ‘안 된다’고만 했다. 배려이자 차별이었다. 그는 “난 여자가 아니라 ‘기자’”라고 항변했지만 부장은 강경했다. 기자 인생의 최대 슬럼프였다. ‘현장’에 갈 수 없는 현실은 카메라기자로서 한없이 무기력한 것이었다. 사안이 장기화되고 취재인력이 부족해지자 데스크는 마지못해 그를 현장으로 보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그해 9월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그는 “내가 가겠다. 이번엔 꼭 보내달라”고 했다. 수십 번, 수백 번 설득한 끝에 금강산에 갈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조차 “카메라가 무겁지 않느냐”고 묻자 실소가 터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한 건물의 옥상 위로 올라갔다. 보이는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주변은 군사시설이 밀집된 곳이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들어와 “왜 여기 올라왔냐. 찍은 걸 확인해야겠다”고 했다. 눈치 채지 못하게 얼른 영상을 복사한 뒤 “봐라. 모두 지웠다”고 연기했다. 별 탈 없이 내려왔지만 정말 떨렸다. 그때 찍은 영상은 이산가족 상봉이 요원한 지금까지도 자료화면으로 잘 쓰이고 있다.

가장 고됐던 입사 3~4년차가 지나자 그는 한결 여유를 되찾았다. 6개월 동안 영상취재팀을 떠나 편집팀에서 많은 여자 선후배들과 힐링도 하고 돌아왔다. 그에게 지난 7년여의 시간은 자신이 여성임을 받아들이고 기자로서의 ‘장점’을 터득한 시간이었다.

1월의 어느 날
2014년 1월 9일. 장갑도 끼지 못한 손가락엔 감각이 없었다. 최저기온 영하 10도. 이날 아침뉴스는 올 들어 가장 강력한 추위를 예고했다. 거리에는 강한 바람까지 불었다.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로 떨어졌다. 하지만 카메라를 조작하는 김 기자의 손놀림은 가벼웠다.

그를 만난 건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빌딩 로비에서였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외모와 말투였다. 의외성에 감탄하고 있을 때쯤, 그는 단호한 한 마디를 남겼다. “취재 중에는 답변이 어려울 겁니다.” 취재 현장에선 그 누구보다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다.

이날 김 기자는 ‘추운 날씨’와 ‘꽉 끼는 부츠’가 허리통증을 유발한다는 주제의 의료 아이템을 맡았다. ‘여자라서 부츠를 잘 알 것’이라는 데스크의 판단이었다. 2분여의 리포팅을 위해 카메라기자, 취재기자, 오디오맨이 한 팀이 돼 한나절 동안 신사동 일대를 누볐다.

취재기자는 자신이 발제를 하고 사전취재까지 진행하지만 촬영기자는 그날그날 취재 아이템을 배정받는다. 전날 오후 늦게, 혹은 출근 직후 부장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 카메라기자에게 ‘순발력’과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부츠 자주 신으세요?” 그가 묻자 허리디스크로 내원한 환자가 “네, 그런 편이죠”라며 수줍게 답한다. 카메라가 어색한 인터뷰 대상자의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려는 노력이다.

화면에 비치는 건 몇 초에 불과하지만 촬영은 30분 이상 진행됐다. 추후에 자료화면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넉넉하게 찍을수록 좋다.



   
 
  ▲ 지난 9일 오후 촬영을 마치고 돌아간 YTN 보도국 영상취재팀 사무실에서 김현미 카메라기자가 동료 선후배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환자가 물리치료를 받는 장면이 필요한데, 마땅히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다. 눈치 빠른 오디오맨이 얼른 점퍼를 벗고 침대 위에 올랐다. 마치 환자인 척, 태연하게 치료를 받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알고 보면 오디오맨이 뉴스에 제일 많이 나온다니까요.”

취재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자 다소 긴장이 풀렸다. “정말 쉽게 끝난 편이에요. 의료 아이템은 스케치를 많이 해야 돼서 은근히 품이 들거든요. 게다가 요즘 같은 날씨엔 중간중간 동파 사고도 생기는데… 오늘은 조용하네요.”

하지만 최대 난코스는 그때부터였다. 바로 ‘거리 인터뷰’다. 추운 날씨에 오가는 행인이 많을 지도 걱정, 부츠를 신은 여성이 있을 지도 걱정, 누가 인터뷰에 응해줄 지도 걱정이다.

“강남 사람들은 인터뷰 요청에 더 박해요. 다들 바쁘대! 12번 시도만에 성공한 적도 있다니까요.” 김잔디 취재기자가 하소연을 한다.

그러나 카메라기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목표물인 ‘부츠신은 여성’뿐. 이리저리 카메라를 돌리고, 밑에서도 찍고 위에서도 찍더니 스케치는 금방 완성됐다. 금세 마이크를 연결해 다음 타깃인 ‘높은 굽의 부츠를 신었으며 인터뷰에 응해줄 만한 여성’을 찾아 나섰다.

대상을 발견하자 카메라기자, 취재기자, 오디오맨이 다함께 전력 질주한다.
“YTN에서 나왔습니다! 평소에 부츠 즐겨 신으시나요?”
“아 몰라요. 찍지 마세요. 부츠 안 좋아해요.”

4명의 여성이 매몰차게 거절하는데도 그는 카메라 앵글을 놓지 않는다. 인터뷰는 못 건졌지만 부츠신고 걸어가는 모습은 스케치용으로 쓰면 되니까. 그 집중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하는 사이 한 여성이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줬다.

선배들은 “김현미 기자랑 현장가면 인터뷰는 쉽게 딴다”고 입을 모은다. 이날 김잔디 기자도 “오늘은 정말 일찍 끝났다”며 “내일도 나랑 같이 할 거지?”라고 못 박았다.

이날 일정은 3시간 만에 마무리됐지만 그의 손끝은 꽁꽁 얼었다. 춥다고 장갑을 끼면 카메라 만지는 데 둔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얇고 따뜻한 장갑 없을까요” 안타까워하는 기자에게 “얇은데 따뜻한 게 어디 있어요? 안 끼는 게 편해요”라며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자부심과 열정으로
회사로 들어가면 취재기자가 원고를 작성하고 리포팅을 녹음하는 동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보안카드를 찍고 들어간 사무실에는 카메라와 삼각대 등 각종 촬영 장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김 기자 옆자리는 바로 지난해 입사한 수습기자의 자리다. 한참 후배인데, 나이는 동갑이다. ‘나이 많은 후배 남자기자’를 대하긴 쉽지 않다. 어떻게 소통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늘 고민이다. “그림이 이렇게 밖에 안 나오냐” 아침마다 타박하지만 행여나 빈정 상하진 않을까 마음 속 한켠은 늘 불편하단다.

대화를 지켜보던 한 후배기자는 “예전엔 김 선배에게 많이 혼났는데 요즘은 충고나 조언을 해준다”며 “다른 선배들이 항상 칭찬하는 기자가 바로 김 선배”라고 했다. “내 앞이라고 좋은 말만 하지 말라”며 민망해하는 그다.

영상취재팀 기자들은 특히 사이가 돈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라고 하면 취재기자, 신문기자만 떠올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자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하다보니 생기는 문제다. 한 선배는 “자존심 지키는 것 때문에 힘들 줄은 몰랐다”고 토로했단다. 취재기자와의 은근한 기 싸움, 취재원의 홀대 등 사소한 문제가 속을 괴롭힌다.

그러나 방송뉴스에서 영상이 없다면? 뉴스가치가 ‘0’이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속속 회사로 복귀하는 카메라기자들의 당찬 목소리에서 자부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또 다른 내일을 위해
편집실로 들어가기 전, 김 기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부장의 호출이다. “무슨 일이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부장과 간단한 대화를 마친 그가 말했다. “이번 설에 출장가래요.”

사실 그는 다음달 15일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부다. 예비 신랑도 ‘카메라가 맺어준 인연’이다. 선배 대신 ‘대타’로 들어간 취재현장에서 연을 맺었다. 입사 면접 때 “결혼 안 하겠다”고 했는데, 한 선배가 “거짓말쟁이”라며 농을 건넸다.

큰일을 앞두고 떠나는 출장인데, 가족들이 동의하겠느냐고 묻자 “그러게요. 한번 물어봐야죠”라고 담담하게 답한다. 예비 신랑과 부모님에게 몇 차례 통화하는가 싶더니 단번에 출장을 결정한다. 가족들도, 남자친구도 그의 직업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는 분들이라고 한다. “결혼 전부터 빼기 시작하면 결혼 후엔 어떻겠어요.” 그는 설 연휴에 맞춰 프랑스로 일주일여 출장을 떠난다.

다음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갑자기 눈이 오네요. 시청 광장으로 오세요”
데스크의 지시가 없어도 사고가 발생하거나 눈·비가 오면 바로 카메라를 들고 나서는 것이 그들의 ‘본능’이다. 그런데 시청 광장에서 만나자마자 거짓말처럼 눈이 그쳤다. 겨우 세 컷 찍었는데. 허무할 만도 하다. “후배들이 그래요. 카메라만 들이대면 흔들리던 깃발도 멈춘다고. 자연 현상이야 말할 것도 없죠.”

평생 현장에서 숨 쉬고 싶다는,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무한한 보람을 느낀다는 김 기자. 출입처인 시청으로 돌아는 길, “사건 터지면 다시 연락할게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연락은 없었다. 365일 중 한가한 날은 단 열흘 뿐이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다시 숨 가쁘게 돌아갈 내일을 위한, 쉼표 같은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김희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