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은사'와 56년…"당신이 잘해준 것만 생각납니다"

[인터뷰]故리영희 선생 평생 동지 윤영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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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선주스쿨 이바닥)  
 
군산공원 함께 걸으며 쌓았던 사랑
석방되면 그저 기쁘기만 했던 세월
‘이제 우리 행복하게 살자’던 약속
그토록 원했지만 가보지 못한 고향
아직도 옆에 살아있는 듯한 그 사람…


천생 어머니였다. 수박 한 통을 들고 물에 빠진 강아지마냥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서는 기자에게 윤영자 여사는 연방 부채질을 해줬다. 그에게 어렵지 않게 “어머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뵈러가야죠?” 손에 이끌려 리영희 선생의 서재에 들어섰다. 여름햇살이 뭉개진 책상 위에 미소를 띠고 있는 리 선생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여보, 기자협회보에서 인터뷰하러 왔어요. 한국기자협회 창립 48주년이라는데 내가 아는 건 잘 말할게요.”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오순도순한 정겨운 대화. 56년 동안 저렇게 애틋한 안식처가 있어 우리는 ‘사상의 은사’를 만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터뷰는 지난 9일 경기도 산본 윤영자 여사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저기 보이는 게 수리산이죠? 생전의 선생과 자주 오르셨다는.
“네. 여기는 그래도 산이 있어서 좀 시원한 편이죠? 아침저녁으로 같이 많이 산을 탔죠. 지금은 혼자 저녁에만 가지. 그 양반 거동 괜찮을 때는 눈 뜨면 나가서 운동하고 걷고 들어오시곤 했어요. 열심히 운동했는데 간이 안 좋았어요. 기관지가 나쁘니까 그것만 치료했죠. 마지막에 간이 나쁜 걸 몰랐어.”

-이 집을 계속 혼자 지키고 계시네요.
“살아야죠. 그 사람 흔적이 있어서 여기가 좋아. 무섭거나 그런 거도 하나도 없고. 꼭 옆에 계신 것 같아.”

본보는 6년 전 리영희 선생과 이 산본 자택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집 안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흐트러짐 없는 깔끔한 거실.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서재, 리 선생이 앉아 있던 흔들의자. 문 앞에 걸려 있는 ‘리영희’ 문패까지도. “왔는가”하며 리 선생이 걸어나올 것만 같았다.

-선생님 물건도 하나도 안 버리셨나 봐요.
“응. 그냥 놔뒀어. 치우고 싶지도 않고. 아들들이 필요한 건 가져가고. 그런데 옷이 안 맞지. 큰애는 아버지 게 맞기는 하는데 옛날 ‘가다’라 안 좋대.(웃음)”

-아드님이 가까운 데로 이사 오시라고 하지 않으세요.
“오라고 하죠. 그런데 이 집 처분하기가 싫어. 서울 연희동에 아들딸이 나란히 이웃해 살거든요. 작은 아들도 서울로 올라왔어요. 다 그 동네에 살아요. 나만 가면 다 만나는 거죠. 그래도 난 여기가 좋아요. 내가 가끔 가서 만나면 되지.”

-손주도 많이 두셨네요. 할아버지 닮은 손주는 없나요.
“손주가 일곱이나 돼. 둘, 둘. 셋 이렇게 낳았어(윤 여사는 2남 1녀를 뒀다). 막내가 많이 났어.(웃음) 손자가 셋이야. 손녀가 넷. 큰 손주가 딸인데 벌써 대학교 2학년이야. 손녀딸 하나가 닮았어. 얼마나 열심인지 몰라. 공부밖에 몰라. 초등학교 6학년인데.”

-손주들도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아나요.
“알죠. 다 알죠. 그 어린 것들도 용케 다 알아. ‘우리 할아버지가 대학 교수였는데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 지네들끼리 그래.(웃음)”

-산본에 1994년에 오셨지요? 신혼은 부산에 마련하시고 서울 제기동, 화양리 거쳐서….
“어떻게 잘 아네. 책을 미리 읽고 와서 그렇구나.(웃음) 아파트는 여기가 처음이야. 옛날 집은 얼마나 추운지 방마다 연탄불 피우고 살았지. 뜨거운 물, 난방 걱정 없이 편히 사는 게 여기 와서 처음이야. 우리 양반이 좀 더 오래 사셨어야 했는데.”

-고향이 제주도시죠.
“그렇죠. 그런데 어려서 육지(전북 군산)로 나왔어요. 그러다가 6·25 때 아버지가 제주도 사시는 할아버지 주소 하나 적어주고 동생들 데리고 피난 가라는 거예요. 군산항에 아버지 아는 선원이 있어서 애들만 먼저 보낸 거지. 1·4후퇴 때라 무서웠지. 그때 제주도 제대로 구경했죠. 그러다가 서울이 수복되고 봄에 육지로 돌아왔어요. 그때만 해도 제주엔 물이 귀했어요. 또 억울하게 핍박도 많이 당한 땅이죠. 우리 집안은 주로 육지에 나와 있어서 희생자는 없었지만요.”

-선생이 어디에 쓰신 것을 보니 처가가 명문가셨다던데요.
“명문가라기보다도 할아버지가 한의학을 하셨어요. 제주도 피난 가서 ‘윤약국’하니까 다 알더라고. 왜정시대 아버지가 모자 가게를 했어요. 친정 쪽이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와서 목포, 군산, 이리, 대전, 청주에 갑자옥 모자점이라는 체인점을 냈어요. 번창했죠. 일제시대 때는 모자 안 쓰면 외출을 못했잖아요.”

-선생도 군산에서 처음 만나셨다면서요.
“해양대가 인천에 있다가 그 당시 군산에 있었거든요. 해대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을 때죠. 그 양반이 해대에 다닐 때 제 친구 언니 하숙집에 살았어요. 그 언니네 집 놀러가서 만났죠. 연애 반 중매 반이지 뭐.(웃음)”

-데이트는 어떻게 하셨는지.
“옛날엔 다 편지로 했지. 전화 그런 거 없었죠. 첫 대면은 그 언니네 집에서 보자고 해서 한번 보는 거야 어떻겠느냐고 하고 만났죠. 다방에서 만나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만났어. 그러고 나서 부대 복귀하니까 편지로 왔다갔다했죠.”



   
 
  ▲ 2007년 윤영자 여사는 신병으로 수술을 받았다. 퇴원 후 첫째아들인 건일씨 집에서 리영희 선생, 손녀들과 함께.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좀 무서우셨을 거 같은데.

“처음부터 그렇게 무섭다고 생각은 안했는데?(웃음) 얘기하면서 마음이 좀 끌렸고. 하루는 저녁에 산책을 갔어요. 거기 군산공원이라고 있어요. 유명한 공원이거든. 걸어가는데 나더러 도로 변으로 가지 말고 안쪽으로 오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도로 쪽으로 가고. 내가 거기서 상당히 끌린 거 같아요. 지금도 안 잊어버리는 거 보니까. 거기서 세밀하고 착한 데가 있구나 느꼈어요. 그게 인상 깊었죠.”

-선생이 청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친정에서도 마음에 들어하셨나요.
“청혼이라기보다도…. 편지 왔다갔다하면서 한 거죠.(웃음) 그때 편지를 다 갖고 있었는데 집 정리하면서 없어져서 좀 아쉽죠. 한 1년간 연애했던 거 같아요. 친정에선 처음엔 반대했지. 그 양반 고향이 이북(평북 삭주)이니까 잘 모르잖아요. 여기 출신이면 어떤 집안인지 다 알 수가 있는데. 나중엔 승낙하셨죠. 친정 부모님이랑 그 양반은 지낼 겨를도 없었죠. 교통이 활발할 때도 아니고 서로 어려울 때니까.”

-그런데 어떤 점이 그리 끌리셨어요.
“글쎄. 그건 알 수가 없네, 정말.(웃음) 처음 봤을 때 그 친구 언니 하숙집 문에 들어서니 말끔히 군복을 입고 서있었죠. 그때 모습이 선해요.”

-군 생활 마치시고 합동통신 기자 되시니까 좋으셨겠어요.
“좋죠. 서울에 오니까 좋죠,(웃음) 너무 좋았죠.”

-그러다 조선일보로 옮기셨고 1964년 필화 사건으로 구속까지 되셨습니다.
“그때 많이 놀랐지. 특히 처음이었으니까 놀랐지.”

-선생이 기자 생활 이후 사회민주화에 관심이 많아지는 걸 느끼셨어요?
“느꼈죠. 유신 때도 ‘앞으로 살기 힘들 것이다.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난 설마 했죠. 난 박정희가 그렇게 악랄하게 될 줄 몰랐지. 그 양반 구속되고 해직당하면서 차차 깨닫게 됐어요. 1977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을때 제대로 알게 됐어요. 나도 사회에 나와서 그 세계를 알게 됐고 양심수 가족들을 만나서 많이 깨인 거지. 64년 때는 잘 몰랐어요.”

-석방될 때마다 바가지도 긁으셨을 것 같은데.
“바가지 긁을 수가 없지.(웃음) 그냥 좋기만 한 거지. 이젠 살았구나, 그거 감사하기도 바빴죠. 그때만 해도 강연이나 쓰시는 글이 많았어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더 많은 청탁이 왔지. 글쓰고 강연하고 오면 항상 불안했어요. 또 뭘 꼬투리 잡아서 잡아가려나.”

리 선생은 한국기자협회와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기협 창립 당시에도 주축 멤버였던 것으로 알려졌고, 1964년 기자협회의 창립 첫 사업이다시피 했던 것이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UN총회 남북 동시 초청’ 기사로 구속된 리영희 기자 석방운동이었다. 2006년에는 기협이 수상하는 ‘기자의 혼’ 상을 받았다.
 
-기자협회와도 인연이 깊으셨습니다. 기협 창립에도 관여하셨다고 하고요.
“그랬을 거예요. 기협이 그 양반 구속되고 석방운동도 많이 했고요. 합동통신 있을 때 외무부 출입하면서 감투를 썼었지. (기자단) 간사죠. 그 양반은 계속 안하려고 했는데 그때 기자들도 부조리가 많고 그랬나봐요. 그래서 자꾸 시킨 거 같아. 그 양반이야 아주 정의파니까. 한 치도 에누리가 없지.”

-그럼 촌지도 전혀 안 받으셨어요?
“안 받았죠. 난 그게 너무 아쉽더라고.(웃음) 조선일보 다닐 땐가. 윗도리 주머니 보니까 봉투에 지폐가 있는 거야. 만원짜리가 상당히 많아. 그때가 기자들 월급이 2만~3만원 할 땐데. 나 이거 한 장만 달라고 했지. 그럼 우선 애들 고기라도 먹이고 쌀도 한 가마 사야 하고. 그런데 호통치면서 안된다고 이건 자기 돈이 아니라는 거야. 보니까 다음날 다 돌려줬다고 하더라고. 아마 누가 억지로 찔러넣은 걸 돌려줬나봐. 몇 달치 월급되는 돈을 가져왔는데 한 장만 주면 좋겠는데 안 주더라고.(웃음)”

-조선일보를 그만 두시고 한동안 공백이 있으셨죠.
“1년 넘게 직장이 없었죠. 그래서 택시운전도 하려 했고 양계장 한다고 책도 갖다 읽고 그랬어. 제기동 집을 팔아서 밑천을 삼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승낙할 리가 없지. 이 집 절대 못 판다고 하시는 거예요. 하기야 아버지도 셋방에서 돌아가셨고 처음 마련한 내 집이었는데…. 결국 책 외판원을 했어요. 그러다 합동통신에서 다시 불러서 갔죠.”

-1972년엔 한양대 교수가 되셔서 이젠 안정되겠구나 생각하셨겠어요.
“그럼요. 가족 다들 좋아했죠. 안정적이고 시간도 많이 나고. 합동통신 외신 기자할 땐 새벽 일을 하잖아요. 차도 불편할 때고. 새벽에 나가서 10시인가 끝나요. 또 끝나고 나면 아침 겸 술 한잔 먹는 게 기자들 상식인가 봐요. 그것도 고급안주 먹을 형편은 못되니 중국집 가서 군만두 하나 시켜놓고 마시는 거예요. 그나마 안주를 잘 안 드시거든. 그래서 위가 많이 상했죠. 술 때문에 일찌감치 간이 나빠진 거야. 위도 ‘빵꾸’나기 직전이었어요. 그런데 박정희 때 2년형 살았잖아요? 형무소 가서 완전히 위가 깨끗해진 거야. 그래서 그 양반이 ‘난 박정희 욕하는 사람은 용서 못한다. 내 병 낫게 해준 사람이다’ 그랬죠.(웃음) 출소해서 위 사진을 찍어보니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거야. 원래 사진 찍으면 위에 흔적이 하얗게 있었거든. 지금도 기억이 나요. 나와서 보니까 깨끗해. 의사가 정말 그랬었느냐고 놀라는 거야.”

-1977년 ‘전환시대의 논리’가 반공법 위반이라며 구속되실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선생이 많이 슬퍼하셨다고요.
“자기가 없을 때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 나는 옥바라지하느라 매일 나가잖아요. 그래도 아침은 내 손으로 먹여드렸는데 자꾸 아들이 어디 갔느냐고 찾으시는 거야. 그래서 학생들이랑 제주도에 갔는데 눈이 많이 와 배가 안 떠서 못 온다고 거짓말을 했지. 그때 시국사건들이 많이 터지니까 기독교회관에서 가족 모임이 많았어요. 나 혼자 앉아 슬퍼할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화양동 집 맞은편에 박형규 목사 댁이 있었어. 그 사모님이 ‘길어봐야 1년이니 참아라’고 하시는데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 양반은 내일모레 당장 나와야 하는데. 그때 너무 섭섭했던 게 기억나.”



   
 
  ▲ 1956년 결혼한 리영희-윤영자 부부의 신혼집은 부산에 있었다. 단칸방에 시부모를 모시고 신혼은 시작됐다. 오른쪽 세 번째가 윤영자 여사, 왼쪽이 리영희 선생.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리 선생의 부친 이근국 옹, 모친 최희저 여사. 나머지 사람들은 시댁 식구들이라고 한다.  
 
-며느리 입장에서도 시어머니 돌아가신 게 슬프셨나봐요.

“당연하죠. 돌아가신 거 인정을 못하겠더라고요. 신혼 때부터 25~6년 모시고 살았는데. 가족이 다 보는 앞에서 밤에 돌아가셨어. 그때 내 집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어. 그런데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어. 좋은 일이 없었지. 아들 구속되고 돌아가시고…. 그런데 그놈들이 임종 때 이 양반을 안 내보내줬잖아. 구속도 되기 전이었는데 변호사가 탄원서도 내고 했는데도. 그렇게 비인간적인 놈들이 어디 있어. 그러면서 충효사상 찾고 그러지.”

-시어머니가 시집살이 꽤 시키셨다던데요.
“어이구. 시집살이 시켰지.(웃음) 이북 여자 분들이 얼마나 억세요. 그 성격에다가 이북 평북동에 일등 부자였대. 손녀도 숙대를 나왔더라고. 그 산골에서 숙대까지 보내면 대단한 집안이죠. 그런 집 딸이니 오죽했겠어.”

-선생이 어머니를 닮으신 모양이네요.
“성격도 어머니 닮았고 얼굴도 닮고. 시아버지는 온순하고 학자셨어. 64년 구속됐을 때, 이름은 잊었는데 담당 검사가 이북 양반이었어. 그 사람이 어머니랑 나를 검사실에 부른 거야. 시어머니가 가자마자 검사 멱살을 딱 잡는 거야.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 당장 풀어내라’고. 우리 시어머니가 그렇게 무서운 분이에요. 대단한 사람이야. 그 양반이 어머니를 닮았어. 자기가 하고 싶은 거 꼭 해야 하고. 남편한테도 안 지는 사람이야. 우리 시어머니는.(웃음)

-선생이 참 많은 굴곡을 겪으셨는데 그때마다 상의는 하셨나요.
“상의는 무슨 상의를 해요?(웃음) 혼자서 다하는 거지. 제기동 한옥집에 살 땐데 앞에 빈터가 있었어요. 경동시장 가는 지게꾼들이 많았거든요. 마루에서 보면 지게 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여. 저 사람들은 비록 노동할지언정 정신적 고통은 없겠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어요. 그 심정 알겠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이를 연행해가면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는 거야. 또 우린 다 필화 사건 같은 단독범행이거든요. 그래서 더 외로웠지. 그래서 지게꾼을 부러워할 때가 있었죠. 그 분 강연이 있다고 하면 나중엔 내가 따라다녔어. 이야기하는 방향이 안좋으면 뒤에서 손짓도 하고 그랬죠. 괜히 꼬투리 잡힐까봐. 그땐 나도 투사가 좀 됐지.(웃음)”

-한겨레 방북취재 건으로 1989년 마지막 구속을 당하셨죠. 그때 법정에서 ‘아내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셨던 게 화제가 되기도 했죠.
“깜짝 놀랐지. 나를 향해서 뒤돌아보며 말하는데 당황했죠. 왜 저런 소릴 여기서 하나. 왜 약한 소릴 하나. 당당하지 못하니까 내가 미안하더라고요. 사실 평상시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석방되면 우리 조용히 살자’고도 했는데 사회가 그렇게 안 만들어주니까….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나서 절필했잖아요. 그때도 ‘우리 조용히 재미있게 살자’고 (식탁을 가리키며) 밥 먹으면서 항상 아침마다 다짐했어요. 우리 85세까지 살자고 했지. 그런데 그걸 못 넘겼어.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파. 여든한살에 가셨잖아요. 아직 돌아가신 지 2년이 못됐어. 12월이 돼야 2년이야.(윤 여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같이 산지 56년…. 정말 일이 많았지. 그런데 세월은 금방 가. 구속되고 공백이 많았지. 그 당시는 뭔지 생각이 잘 안 나고, 인생의 중간이 붕 떠있는 거 같아. 그래도 마지막 20년은 정말 기억에 남아. 마음이 편했고 행복했으니까.”

-선생이 제일 힘들어했던 때는 언제였나요.
“조선일보에서 쫓겨나고 제일 어려웠지. 애들은 어리고 어머니도 계시고 정세도 기미가 없고…. 그러니까 양계장, 택시기사 별 궁리를 다 했죠. 그리고 구속 때 어려운 건 말할 것도 없죠. 애들이랑 생활하기가 어렵잖아요. 아이들이 어리니 내가 부업을 할 수도 없고. 우리가 합쳐서 8년 동안 수입이 없었어요. 그나마 많은 분들이 도와줘서 먹고살았죠. 그래도 그 분은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가족과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하고 싶은 거 다 했다. 난 후회하지 않는다’. 그 말은 꼭 했어요. 당신은 굴하지 않고 생각대로 올바로 살았죠. 그리고 ‘집도 생겼고 애들도 대학은 다 보냈고 그럼 뭐 바라겠느냐’고 했죠. 마지막 여생은 우리 둘이 여행 다니면서 잘 살자고 했어요. 마지막에 국내라도 돌아다니려 했는데 그걸 못한 거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은 없었나요.
“그런 게 없었어요. 당신도 그렇게 갈 줄 몰랐거든. 나도 꼭 일어날 줄 알았어. 그해 겨울이 참 추웠어. 밖에도 잘 못 나가고. 그런데 자꾸 배가 부르는 거야. 나중에 보니까 복수가 찬 걸 미처 모른 거예요. 그게 2010년 2월인데 열 달 동안 통원치료하시고 마지막 한 달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죠. 게다가 나중에 말도 잘 못하시게 돼서…. 그런데 병원에 누워계실 때 갑자기 ‘빨리 가’라고 하셨어요. ‘어디를 가요?’ 하니까 그냥 또 ‘빨리 가’ 하시더라고…. 아마 집에 가자고 그러신 거 같아. 조금 괜찮을 때 산본에 와서 마음 정리라도 하시게 할 걸. 그게 후회스러워….”

리 선생은 평생 동안 기자로서 두 번 해직, 교수로서 두 번 해직되고 모두 다섯 번 구속됐다. 한 사람의 인생이 파란만장할수록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윤 여사는 56년간 한결같이 이 거대한 소나무를 적시는 단비였다.

-선생이 평생 구속과 해직을 반복하고 편한 날 없이 지내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평생 변함없이 곁을 지키실 수 있었는지….
“그야 아내니까. 마누라니까 하지요. 이 양반이 가시고 나니 제일 가까운 게 부부라는 걸 알았어. 내가 친정 부모 돌아가셔도 이렇게 슬프지 않았다고. 그때는 내 살림이 있으니까 연세 들어 가셨나보다 하고 집에 와서 빨리 내 새끼랑 살 궁리를 했지. 그런데 그게 아냐. 아마 평생 죽을 때까지 그러겠지. 내가 지금 많이 안울지만…. 그러니까 그냥 그 힘이지. 다른 거 없어요. 부부일심동체라고 하잖아.(윤 여사는 눈물에 말을 잇기 어려워했다)”

-생전 “나는 가족중심주의를 배격했다”는 말씀도 하셨죠. 하지만 좋은 아버지가 못됐다고 안타까워 하셨다는데.
“한번은 딸이 어떤 잡지와 인터뷰하는데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받았어요. 그랬더니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선생님처럼 생각해요’라고 했어요. 자상하고 다독거리고 그런 건 없어요.”

-따님은 학생운동도 하셨다던데요.
“좀 속 썩였지. 아버지를 제일 닮은 게 그 애예요. 머리도 제일 좋고 공부도 제일 잘하고. 성격도 아주 무섭지. 할머니, 아버지, 딸 이렇게 내려오는 거예요. 우리 아들들은 순해. 말도 없고. 그래서 그 애는 뭐 하나 시키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연세대 가서 학생운동하고 공장에 들어가고 했지. 말리기도 했지만 소용없더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더라고. 정말 아버지랑 똑같더라니까. 아버지가 예뻐했는데 학생운동을 하니 걱정 많이 하셨죠. 부녀가 무섭게 싸우기도 잘 싸웠어.(웃음) 그래도 선생이 마지막 병원 계실 때는 딸애가 뒷바라지를 다 했어요.”

-아버지의 신변이 항상 불안해서 아이들이 마음잡기가 힘들었을 텐데.
“그랬죠. 아버지가 나쁜 일해서 그랬으면 어떤 심정이겠어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긍지가 있었던 거 같아요. 저도 떳떳했고, 아버지는 옳은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줬죠. 큰아이가 아버지 재판 보러갔다가 눈물 흘리는 것도 봤어요.”

윤 여사의 책상에는 일본의 정치월간지 ‘세카이(世界)’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한겨레신문이, 창작과비평이 차곡차곡 탑을 이루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신문 읽는 것으로 시작해 책 읽는 것으로 마친다고 했다. 사랑이란 기꺼이 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북한에 선생의 조카가 살아계시죠. 예전 방북 때 상봉도 하셨는데 지금은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습니다.
“생사는 모르지만 아직 살아있겠죠. 언젠가는 통일이 되겠지. 조카를 한번 찾아가고 싶은데 내가 살아있을 때 통일되면 주소가 있으니까 찾아갈 수 있죠. 우리 양반 생전에 내 고향 제주도에 같이 갔을 때 ‘이제 내 고향만 가보면 된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못 보시고 갔어요.”

-요즘 언론계도 많이 시끄럽습니다. 파업도 크게 했고 해직기자도 많습니다.
“그러게. YTN도 그렇고…. 그 MBC 사장 참 사람이…. 회사 돈으로 명품 가방 사고 귀금속 사고 호텔 가고 말이 되는 소리예요? 참 해직기자도 많던데 복직도 안 시켜주고…. 그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참아야죠. 우리 힘으로 안되는 걸. 하지만 서로 힘을 합치면 용기가 생기고 큰 힘이 나와요. 혼자서는 외롭지만 여럿이면 강해져. 이걸 지혜롭게 넘겨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큰일이야. 정권이 바뀌어야지 안되겠어요. ”

-꿈에서는 가끔 선생을 만나시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사진 보면서 오늘 일과가 뭔지 보고하고, 어디 나갔다가 오면 보고하고 그래요.(웃음) 그럼 같이 앉아서 대화하는 거 같아. 그런데 꿈에 나타나지도 않고 너무 야속해. 딱 한번만이라도 살아나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어. 내가 못해준 거만 생각나요. 자기 하는 일에 일찌감치 동조하고 수고했다고 한 마디라도 더할 걸.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자국이 너무 크니까요.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는 굉장했어요. 미리 더 칭찬도 해주고 더 좀 따습게 해드릴 걸. 못한 게 후회돼요. 나한테 나쁜 소리도 했겠지만 잘해 준 거만 생각나고, 나는 못해 준 거만 생각나. 마지막에 많이 행복했죠. 그렇지 않았다면 더 후회했겠죠.”

-선생이 애정 표현은 서투르셨을 거 같아요.
“말은 안하지. ‘당신 수고했어, 고생 많이 했어’ 소리는 잘해요. 나중에는 많이 다정해졌지. 내가 어디 가면 여기(발코니) 창문 열고 꼭 내다봤어. 어쩌다 돌아보면 잘 갔다오라고 손 흔들고…. 당신이 어디 갈 때면 저만치 가다 꼭 쳐다본다고. 그게 그분의 사랑 표시였죠.”

“점심을 해줘야 하는데….” 발을 동동 구르는 윤 여사에게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섰다. 어제보다 어딘지 서늘해진 여름 햇살을 손으로 가리려다 넉넉한 수리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산은 저렇게 여전하고 고즈넉한 거리도 변함없는데 오직 한 사람만 부재했다. “난 애국주의자가 아냐. 자기 국가, 자기 정부, 자기 사회라 하더라도 진실을 기본 정신으로 삼지 않는다면 난 그 국가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어. 진실만이 내가 추구하고 숭배하는 가치야.”(기자협회보 2006년 리영희 인터뷰 중에서)
(사진 제공=선주스쿨 이바닥, 윤영자)



윤영자 여사는
윤영자 여사는 1932년 제주도 모슬포에서 파평 윤씨 가문 윤평숙의 맏딸로 태어났다.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전라북도 군산으로 옮겨 군산여고를 졸업했다. 1955년 육군 대위였던 리영희 선생을 만나 이듬해 10월13일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건일, 건석, 딸 미정씨를 두었다.

윤 여사의 성품은 리 선생이 1988년 저서 ‘역정’에 실은 ‘아내 윤영자와 나’라는 글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논리를 따지는 성격이고 그는 모난 것이 딱 질색인 성격이다. 나는 까다롭게 분석하고 시비를 가려야 만족하는 형인데 반하여 그는 덤덤하고 두루뭉술한 형이다. 내가 만사에 정삼각형이고자 할 때 그는 타원형으로 나타난다. 만약 그의 성격이나 마음이 삼각형이거나 사각형이었다면 두 사람의 생활은 30년을 잇지 못했을 것이다.”

리 선생은 생전에 모진 시련 속에서도 평생 시부모와 자신을 뒷바라지하고 스스로도 사상적·행동적 성장을 이룬 윤 여사를 존경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2005년 인터뷰 형식의 자서전 ‘대화’의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긴 세월에 걸친 문필가로서 나의 인생의 마지막 저술이 될 이 자서전을 결혼 이후 50년 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오로지 사랑하는 자식들과 못난 남편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힘겹게 극복하고 굳건한 의지로 헤쳐온 존경하는 아내 윤영자에게 바친다.”

리 선생은 82세 생일 사흘 뒤인 2010년 12월 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윤 여사는 현재 1994년 이주한 경기도 산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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