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협회보가 쌓은 나이테 2000겹… 넘어지고 찢겨도 계속 달려온 역사

[기고]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전 기자협회보 편집실장)

기자협회보는 한국 언론의 얼굴이고 심장이었다. 1964년 여름 언론파동이 일단락되고 기자협회 창립 3개월 후 11월에 창간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56년 지령 2000호의 나이테를 쌓았으니 우리 언론사상 초유의 자랑스러운 기록이다.


기자협회보는 한국기자협회의 기관지인 동시에 전체 언론계를 대변하는 유일한 신문이었고 언론현실의 부조리를 숨김없이 밝히는 감시자였다. 여론의 광장이자 열린 토론장, 언론자유의 수호자, 기자권익 옹호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의 거울인 신문의 거울이 되고자 했고, 사회의 목탁인 신문의 목탁을 자임했으며 역사의 기록자인 언론의 기록자가 되려는 자세였다. 유신시절 한 때는 ‘신문의 신문’이라는 말을 들었고, 한국에 남은 유일한 신문은 기자협회보밖에 없다는 과장된 평가도 있었다.


①이영희 교수 편지. 1973년 7월 협회보 ‘월간’ 발행 탄압의 빌미가 된 글 때문에 이영희 교수와 편집실장 정진석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고초를 겪은 데 대해 미안하다는 뜻을 전한 편지. ②폐간의 빌미가 된 증면호. 처음에는 ‘호외’로 발행하려고 편집하였다가 ‘증면호’로 변경하여 발행하였으나 이로 인해 폐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③명동성당에서 인쇄한 ‘알림’. 협회보 폐간 후 ‘알림’을 6호까지 발행했다. 이 마지막 알림은 협회보 축쇄판에 누락되었다.

▲①이영희 교수 편지. 1973년 7월 협회보 ‘월간’ 발행 탄압의 빌미가 된 글 때문에 이영희 교수와 편집실장 정진석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고초를 겪은 데 대해 미안하다는 뜻을 전한 편지. ②폐간의 빌미가 된 증면호. 처음에는 ‘호외’로 발행하려고 편집하였다가 ‘증면호’로 변경하여 발행하였으나 이로 인해 폐간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③명동성당에서 인쇄한 ‘알림’. 협회보 폐간 후 ‘알림’을 6호까지 발행했다. 이 마지막 알림은 협회보 축쇄판에 누락되었다.


당대의 논객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기협회보는 기자의 기백 보여주는 산 증거”(지령 100호, 1969.10.3.)라면서 기자협회보의 용기 있는 태도를 칭찬했다. 열띤 논쟁을 벌이면서 허심탄회하게 언론현실 타개를 모색하는 고뇌의 현장이 협회보였다. 언론 외길 ‘홍박’(‘홍종인 박사’의 약칭 겸 애칭)은 자타 공인 대한민국의 ‘대기자’였다. “언론의 사명 다하고 있는가, 언론의 자유 죽느냐 사느냐”(62호, 1969.1.10.)고 후배 언론인을 질타하자,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는 “진짜 책임자가 누구냐, 홍종인 선생님에게”(64호, 1969.1.24.)라는 공개서한으로 반론을 폈다. 원로 언론인께서 화살을 왜 안으로 돌립니까, 외부 압력에 맞서 싸워달라는 주문이었다. 논설위원, 편집국장, 부장의 참여도 활발했고, 언론 학자, 문인, 정치인의 글도 실어서 협회보는 민주언론의 보루이자 사회의 공기(公器)로도 기능하였다.


그러나 그런 역할로 인해서 협회보는 정치적 격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영희 교수의 ‘신문은 하나 둘 사라지는데’(288호, 1973.6.22.)라는 글로 인한 필화가 있었다. 이영희 교수는 중정에 연행되어 사흘간 조사를 받았다. 이 글을 빌미로 정부는 주간이던 기자협회보의 월간 발행을 강제했다. 1973년 7월4일이었다.
협회보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실정법상으로는 주간 발행이 불가능한 간행물이었다. 문공부는 협회가 사이비기자 일소, 권익옹호, 언론인 자질 향상과 같은 언론창달을 목표로 발행된다는 사실 때문에 주간 발행을 묵인하고 있었지만 일관된 정부비판 논조에 불만을 품다가 이영희 교수의 글을 문제 삼은 것이다. 세월이 흘러 민주화 이후 중앙정보부가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뀐 2007년에 발표한 <과거와의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보고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한국기자협회는 1973~1975년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 교량역할을 해 왔다. 기자들의 성명발표나 노조결성, 기자 해고 등에 대해 자세히 보도하고 당시 언론상황에 대한 외부 기고를 통해 언론통제 실상을 고발해 왔다”면서 협회보의 역할을 평가한다.


협회보의 월간 발행 요구는 여론형성과 비판기능을 거세하겠다는 조치였다. 유신헌법 공포(1972.12.27) 다음 해의 삼엄한 정치상황에서 기자협회가 문공부(중앙정보부)의 지시를 거역할 힘은 없었다. 언론인들의 대변지였고 살아있는 언론으로 불리던 협회보는 이리하여 ‘월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중정에서 풀려난 이영희 교수는 자기의 글 때문에 협회보가 월간이 되었고 편집실장 정진석도 중정에 불려가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기협회장에게도 인사와 사의(謝意)를 표해달라는 간략한 편지를 7월14일자로 보내왔다.  


월간발행 7개월 박기병 회장은 당국과 교섭을 벌이는 동시에 정계의 여러 인사들을 설득하여 1974년 2월22일자 지령 300호부터 어렵사리 주간 발행으로 되돌려 놓았다.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폐간’이라는 사형선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발단은 1975년 3월7일에 발행한 ‘증면호’였다.


1973년에서 1975년에 걸치는 사이에 언론계는 일찍이 경험한 적 없던 큰 진통을 겪고 있었다. 기자와 경영주 간의 갈등인 동시에 언론과 권력의 대립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얽힌 거대한 삼각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동아-조선 사태와 전국 언론사로 확산되는 언론자유 수호투쟁, 동아일보 광고탄압 등의 긴박한 언론 상황 전개에는 기자협회보가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정부는 마침내 1975년 3월10일 협회보를 ‘폐간’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들고 나왔다.


기협보는 매주 금요일 발행이었는데 3월7일자(지령 351호)를 정상 발행한 뒤에 3월8일(토요일)자로 추가 발행한 ‘증면호’가 문제였다. <조선, 이번엔 기자 5명 파면>이라는 통단 배너 컷을 단 ‘호외’로 조판을 마쳤다가 회장단과 논의 끝에 증면호로 명칭이 바뀌었다. 앞면만 기사가 실리고 뒷면은 백지였다. 실지 발행은 3월8일이었는데 ‘증면’으로 했기 때문에 7일자 발행으로 맞추었다. 기자협회보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인 호외였다.


문공부는 월요일인 3월10일 ‘정기간행물 등록취소’를 통보했다. 등록취소는 ‘폐간’의 법률용어다. 이유는 ①약속한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았으며 ②주 1회 발행 신문을 ‘증면호’라는 이름으로 2회 발행하여 법을 위반하였으므로 ‘부득이’ 등록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제 기자협회는 얼굴 없는 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뉴스레터 형식으로 ‘기자협회 회원 여러분께 알리는 소식’이라는 『알림』을 활판인쇄, 프린트, 또는 사진식자 방식의 지하신문처럼 만들어 회원들에게 알리고 기협의 활동과 기자들의 언론자유 투쟁소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오늘날은 컴퓨터 입력과 조판으로 손쉽게 인쇄물을 만들 수 있지만, 그때는 손으로 써야하는 아날로그 시대였다.


처음에 멋모르고 ‘소식’을 인쇄해 준 서울신문 외간부(外刊部) 담당자가 당국의 압력으로 인쇄를 거절하는 바람에 기사를 들고 다니며 프린트 인쇄로도 발행해 보다가, 명동 성당의 가톨릭출판사 사진식자 시설을 이용하여 협회보의 역할을 대행하는 유인물을 계속 배포했다. 이 빈약하지만 의미 있는 부정기 ‘알림’은 5월3일까지 6호를 발행하고 회장단의 와해로 그마저 중단되었다.


1975년 12월1일 협회보는 8개월 만에 겨우 월간으로 복간했다. 그러나 폐간된 간행물은 2년 동안 같은 제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법률 규정 때문에 ‘기자협회보’라는 제호를 쓸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기자협회의 이미지를 가장 가깝게 살릴 수 있는 ‘기협회보’를 택해서 ‘월간등록’을 마쳤다. 2년이 지난 1979년 1월31일(지령 394호)에 원래의 제호 기자협회보를 되찾았지만 거기가 끝은 아니었다. 두 번째 폐간과 제호 변경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0년 ‘서울의 봄’에 기자협회보는 ‘계엄철폐-검열철폐-제작거부’ 운동을 펼치던 와중에 5월17일의 계엄령 선포와 함께 기협 집행부와 편집실 기자들이 집단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7월31일에는 마침내 폐간(등록취소)이라는 두 번째 사형선고의 철퇴를 맞았다. 1년 2개월 동안 숨이 끊어져 있던 협회보는 1981년 7월10일(지령 411호)에 겨우 월간으로 살아났지만 제호는 또다시 ‘기협회보’로 후퇴했다. ‘기자협회보’라는 원래의 제호는 5년 후인 1985년 7월13일에야 다시 찾았고, 주간 환원은 1988년 5월27일(지령 495호)부터였다. 한 해 전의 6·29 선언으로 신문 등 정기간행물의 등록이 자유로워진 상황 변화로 새로운 신문 잡지들이 쏟아져 나오던 무렵이었다. 수난의 역사를 되새기기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넘어지고 찢어지면서 달려온 지난날의 상처였다.


기자협회보가 권력과의 투쟁과 대립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언론인의 자질향상 프로그램도 실시하여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언론인 연수를 비롯하여 사이비기자 일소, 무보수 또는 면세점 이하 급료 인상 캠페인은 모두 기협보의 지면에 비중 있게 반영되었다.


국세청에 요청하여 입수한 전국 언론사 세금 납부 자료로 각사 사장에서 초임기자까지 개인별 급료카드를 만들어 추출한 직급별 통계표는 특집으로 발표하여 급료인상 자료로 활용하고 경영주의 각성을 촉구하는 실질적인 효과도 거두었다.(지령 245호, 1972.8.11.; 지령 432호, 1974.12.27.) 보너스와 휴가를 비롯한 복지 현황 등도 상세히 알려서 권익옹호에도 크게 기여했다.


언론환경의 변화로 1980년대 말부터 협회보의 위상도 달라지게 되었다. 방송계의 ‘PD연합회보’(1988년 1월, 2006년 1월부터 ‘PD저널’로 제호 변경)와 언노련의 ‘미디어오늘’(1989년 1월17일, ‘언론노보’로 창간되었다가 1995년 5월17일 현재 제호로 바꾸었다)의 등장과 언론 직능단체가 발행하는 간행물 등으로 언론 전문지의 위상과 지형이 다양화하는 형태로 양상이 바뀐 것이다.


기자협회보 지령 2000호라는 언론역사 최초의 경사를 축하하면서 혹시라도 이념적 편 가르기 현상에 자기도 모르게 경도되지 않았는지 성찰해 보기 바란다. 언론계 전체를 아우르는 매체, 권력의 감시자였던 지난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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