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포퓰리즘이 불러낸 80년대 민주화 운동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특파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몸살을 앓는 브라질에서 때아닌 민주주의 논란이 가열하고 있다. 원인 제공자는 극우 포퓰리스트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그의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태에 맞서 좌파와 중도 계열의 정당과 시민사회가 결속하면서 ‘민주주의 가치 수호’라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브라질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인 ‘지레타스 자’(Diretas ja; ‘지금 당장 직접선거를’이라는 뜻)다. 군사독재정권(1964~1985년) 말기인 1984년에 절정에 달한 ‘지레타스 자’는 21년간 계속된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끌어내 브라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민운동이 성공한 이후 짧은 혼란기를 거쳐 1990년에 대통령 직접선거가 치러지면서 헌정질서가 자리잡았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이 1980년대 상황을 불러내고 있다. 반대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지지 기반을 다지는 정치 방식과 의회·대법원 등 헌법기관에 대한 거침없는 공격적 발언은 우파 진영마저 고개를 돌리게 만들고 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는 ‘반 보우소나루’ 블록이 형성되고 있다. 이들은 모든 논란과 정쟁을 중단하고 보우소나루 퇴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한 대법관은 현재의 정국을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비슷한 상황에 비유하면서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에 맞서야 한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지난달 말 이뤄진 여론조사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1989년 이후 역대 최고치로 나왔다. 이 조사에서 ‘민주주의 정권이 다른 어떤 정부 형태보다 항상 낫다’는 의견은 75%였다. ‘민주주의 정권이든 독재정권이든 상관없다’는 답변은 12%, ‘특정 상황에서는 민주주의 정권보다 독재정권이 낫다’는 답변은 10%였다. 2018년 10월 대선을 전후해 이뤄진 조사에서는 답변 비율이 69%·13%·12%였다. 이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 14년째 계속된 좌파정권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당시 보우소나루가 주도한 ‘극우 돌풍’이 반영된 결과였다. 여론의 이런 변화를 두고 보우소나루 대통령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온다.


언론도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극우 행보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꼽히는 폴랴 지 상파울루는 최대 방송사 글로부 TV와 공동으로 ‘지레타스 자’를 본뜬 민주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특집판을 통해 과거 군사독재정권 당시 상황을 낱낱이 소개하고 브라질 사회에 남긴 상처를 고발했다. 언론단체 차원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언론협회는 브라질변호사협회와 함께 작성한 보우소나루 대통령 탄핵 요구서를 하원의장에게 제출했다. 두 협회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지지자 집회에 참석해 군부의 정치개입과 의회·대법원 폐쇄를 부추기는 연설을 한 사실을 들어 그를 형사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법질서에 대한 불복종을 부추기고 군을 자극하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언론협회와 변호사협회는 1992년에 이뤄진 대통령 탄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중도 정당들에 각료직을 제의하면서 의회에 지지 기반을 넓히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탄핵이 추진되더라도 표결을 통해 부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흥미롭게도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은 코로나19에 가려져 있다. 브라질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코로나19 피해가 많이 보고되고 있다. 보우소나루 정부는 초기대응에 실패해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 덕분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야권의 공세를 상당 부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유력 야당의 원내대표가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보우소나루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일찌감치 추진됐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코로나19가 정점을 찍고 나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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