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청와대가 2008년 KBS 사장 교체 과정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담긴 문건이 나왔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가 정연주 사장을 불법 해임하고 이후 KBS 신임 사장 선임에 개입했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은 있었지만 정부 문건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BS 진실과미래위원회는 2008년 9월17일 시행된 인사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2008년 청와대 정무수석실, 대변인실, 국정조사 상황실 등에서 작성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건 18개를 입수했다. 이 문건은 지난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소유한 영포빌딩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검찰이 확보한 문건 가운데 일부로, 정무수석실이 작성했다. 당시 정무수석은 SBS 앵커 출신 맹형규씨였다.

2008년 8월18일 대통령 정무수석실이 보고한 ‘주간동향 및 분석’ 문건에는 정연주 사장 해임에 대해 비판 여론이 약간 우세하나 당장 대규모 반대시위로 옮겨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적혀 있다. 다만 KBS 문제가 YTN 등과 연계되는 등 정치쟁점화하고 장기화될 경우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며, 가능하면 올림픽이 끝나기 전 신속히 후임 인사를 단행해 관심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친 정권 이미지가 강한 인사의 임명은 강한 반발로 이어져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면서 이명박 대선후보의 언론특보였던 김인규씨를 KBS 사장에 임명할 경우 ‘방송장악 음모’ 등식이 성립해 역풍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KBS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방송 전문가로 조직 장악력이 있는 비정파적 인사를 물색하고, 새 사장 임명과 함께 설득력 있는 KBS 정상화 방안을 발표하되, 다양한 내부 개혁조치 등을 통해 KBS 내부 반발을 무마시키는 방안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008년 8월18일 대통령 정무수석실이 보고한 ‘주간동향 및 분석’ 문건.

이 문건이 보고되기 하루 전인 2008년 8월17일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유재천 KBS 이사장이 KBS 사장 후보자들과 만나 이른바 ‘8.17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사실은 2008년 8월22일 경향신문의 보도로 알려지게 됐으며 모임에는 김은구 전 KBS 이사, 박흥수 강원정보영상진흥원 이사장(전 KBS 이사), 최동호 육아TV 회장(전 KBS 부사장) 등 KBS 출신 인사들이 동석했다. 경향신문은 당시 이 자리가 사실상 KBS 사장 후보자 면접을 하는 자리였다고 보도했다.

이후 2008년 8월19일 김인규씨가 사장 응모 포기 성명을 발표했고, 후보자 접수 이틀 뒤에 경향신문이 위의 보도를 내면서 유력 후보로 꼽히던 김은구씨가 낙마했다. 이후 8월25일 대통령 정무수석실이 작성한 ‘주간동향 및 분석’ 내용에는 KBS 노조에서 이병순씨에 대해 수용 입장이어서 파장은 크지 않겠지만 야당이 대책회의와 관련,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등 공세를 펼치는 데 대한 대응책 마련, 대책회의 참석자 문책 요구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언급됐다. 그러면서 경과에 잡음은 상당수 있었지만 일단 새 사장이 취임하고 나면 KBS 사태는 일단락되는 셈이라며 이미 최근 KBS 보도태도를 보면 정연주 사퇴 이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8년 8월25일 대통령 정무수석실이 작성한 ‘주간동향 및 분석’ 문건.

진미위는 이와 관련 “두 문건의 내용으로 볼 때 사장 후보자 김은구 후보 내정, 김인규 사장 응모 포기, 특정인 사장 선임 과정을 청와대가 기획했고 실제로 그대로 실행됐음이 확인된다”며 “특히 김인규씨가 갑작스럽게 사장 응모 포기 성명을 발표한 이유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고, 본인은 ‘혼란한 KBS 사태의 장기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응모 포기를 결심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전에 청와대의 지시 내지 교감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밝혔다.

한편 진미위는 지난 5일 제6차 위원회를 개최하고 ‘2008년 9.17 부당전보 의혹’에 대한 보고서를 채택, 의결했다. ‘9.17 인사’는 KBS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 징벌적 인사로 당시 KBS에서는 탐사보도팀이 해체되고 <미디어포커스>와 <시사투나잇>이 폐지됐으며 윤도현, 정관용, 진중권, 유창선 등 MC들이 대거 하차하는 ‘블랙리스트’ 사태가 빚어졌다. 대통령 라디오 주례연설 편성을 강행하는가 하면 사원행동 지도부에 대한 파면과 해임도 잇따랐다.

특히 진미위는 조사 결과 ‘9.17 인사’에서 정연주 사장의 기자회견을 준비했던 홍보팀 직원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다른 부서로 발령 난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발령 나기 전 모 간부로부터 ‘다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발령이 난 뒤 간접적으로 정연주 사장의 기자회견 개최 실무를 담당한 직원들이 대상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진미위는 “이 전보의 이유가 기자회견 진행과 사보 발행에 대한 보복인지 여부는 확정할 수 없으나 당시 홍보팀 직원 20여명 가운데 4명이 특별한 이유 없이 한꺼번에 타 부서로 전출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밝혔다.